로컬 에디터 4기

from 실버ㅣ낭만은 등잔 밑에 있었다

서울시 금천구 가산동. 이곳에 온 지도 3년이 다 되어 간다. 대학교 졸업 후 환경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무작정 찾은 새 보금자리다. 이곳으로 이사 온 데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당시 취준생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빼곡한 회사 건물에 역 이름도 ‘가산디지털단지’라 첫인상이 조금 딱딱했지만 그래도 이 동네가 꽤 마음에 들었다. 한강을 넘어 남쪽으로 조금 내려왔을 뿐인데. 새로워진 환경에 그냥 기분이 좋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다. 카페, 빵집, 도서관 등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새 동네에서의 설렘을 느끼던 것도 잠시, 얼마 안 가 익숙하고 편한 곳들만 찾게 되었다. 카페도 가던 곳만 가고, 다니던 길로만 걸어 다녔다.

그냥 지나치면 모른다. 

철산대교 위에서 본 안양천, 서울 금천과 경기도 광명 사이 ©실버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어?!’

작년, 옆 동네 큰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원래라면 버스를 타고 갔을 길을 이날따라 왠지 걸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가다 확 트인 시야가 나를 사로잡았는데 '안양천'이었다. 사실 버스로 몇 번 지나가 본 길이기 때문에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을 거다. 근데 별생각 없이 그냥 지나쳐버린 건지 안양천이 제대로 보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집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이사 온 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눈에 들어오다니. 주변을 잘 둘러보지 못한 과거의 내가 참 아쉬웠다.

8월 한여름의 안양천은 초록색으로 덮였다 ©실버

안양천은 매우 크다. 서울 강서구에서부터 저 아래 경기도 의왕시까지 쭉 뻗어있는 하천이다. 길이가 무려 32.5km나 된다던데 아직 안양천의 1/16밖에 경험하지 못했다는 게 놀랍다. 

 오리 만난 날, 이건 그냥 지나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실버

안양천을 제대로 알게 된 이후로는 틈만 나면 갔다. 주로 산책이나 러닝을 한다. 굳이 먼 한강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혼자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았다.

이곳에서 느끼는 행복은 다양하다. 이어폰을 낀 채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걷고 뛰는 순간도 좋고, 이른 아침 조깅하시는 어르신들 사이에서 은근한 소속감을 느끼며 산책하는 것도 좋다. 다리를 건널 때 가끔 오리도 만난다. 도심 한복판에서 오리라니. 한강뷰 아파트도 좋지만, 안양천 水세권에 사는 나도 꽤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 같은 밤 풍경 ©실버 

밤에 가면 낮과는 전혀 다른 안양천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초록빛이 물든 낮의 모습은 어디 가고 밤의 안양천은 화려하고 반짝이는 불빛이 가득하다. 밤에는 주로 러닝을 하는데 열심히 뛰다가도 눈앞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자꾸 카메라를 켜게 된다. 평소 똥손이라 불릴 만큼 사진 찍는 것에 큰 재능이 없는 나도 꽤 실력 있는 사진작가가 될 만큼 경치가 아름답다. 

낭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이전에는 낭만을 ‘일상적이지 않은 특별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분위기 좋은 LP 바나 노을이 멋진 바다 같은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양천을 즐겨 다니는 지금은 낭만이 생각보다 평범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잔잔한 물결에서 오는 평온함, 달릴 때 보이는 그림 같은 풍경, 우연히 만난 오리까지.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집 근처 하천에서 느꼈던 많은 것들이 다 낭만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때로는 가까이 있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해서 혹은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잘 들여다보지 않아서 그렇다. 안양천 말고도 그냥 지나쳐버린 곳이 참 많을 것 같아서 아쉽다. 이제라도 놓치는 것 없도록 주변을 향한 안테나를 바짝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낭만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운 곳부터 살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