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 | 박누리 (고래실)
인터뷰 ep.44
오랜만에 옥천에 갔어요. 팟캐스트 귤PD이자 사회적기업 고래실의 상윤님을 만나러 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지났네요. 오늘의 주인공은 상윤님의 동료인 누리님이예요. 누리님도 옥천이 고향은 아니래요. 지역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으로 와, 13년째 옥천살이 중이라네요. 도대체 옥천에 무슨 매력이 있기에, 또 어떤 꿈을 이루고 있기에 10년이 넘게 머무는 걸까요? <월간 옥이네> 편집장이자, 13년 차 옥천러 누리님을 만났습니다.
이건 운명이다.!
옥천에서 13년째 살고 있어요. 이곳에 오기 전에 옥천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어요. 유일하게 아는 거라곤 옥천신문이었죠. 언론정보학을 전공했거든요. 언론정보학 수업을 듣다 보면 옥천신문은 한 번쯤은 꼭 듣게 되는 이름이에요.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 미디어도 서울 중심이잖아요. 근데, 그 반대되는 지역 미디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꼭 언급되는 게 옥천신문이었죠. 지역 신문의 대표주자로 여겨졌달까요? 마침 마지막 학기에, 옥천신문에서 기자 채용공고가 떴어요. 기자가 되고 싶었고, 웬만하면 서울 중심보다는 지역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던 터라, ‘이건 운명이다’ 싶었죠.
처음에는 옥천에 정착하는 것보다 취재 기자로 적응하는 데 집중했던 것 같아요.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것도 벅찬 신입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옥천신문의 기자여서 지역사회에 안정적으로 그리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옥천신문 기자라는 명함이 제 신분을 보장해 주는 느낌이었죠. 또, 어린 여자애가 기자라면서, 혼자 카메라를 들고 왔다 갔다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할머니, 할아버지 눈에 신기하고 좋아 보이셨던 것 같아요. 그냥 그 모습 자체로 잘해주시기도 했어요. 시간이 지나서 신문에 박누리라는 이름을 달고 기사나 나가기 시작하니, 처음 보는 주민들이 “혹시 박누리 기자신가요?”하고 먼저 아는 척을 해주시더라고요. 우리 동네에 관해 쓴 기사 잘 봤다면서요. 이런 경험들이 참 좋았어요. 지역 미디어에서 일하는 매력과 보람을 톡톡히 느꼈죠.
지역 미디어에서 일하는 매력과 보람을 톡톡히 느꼈죠. Ⓒ탐방
옥천신문 기자로 9년을 보내고 나니, 고민이 생겨났어요. 가장 큰 고민은 예전만큼 신문을 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거였죠. 3~4년 차 때만 하더라도 옥천신문 발행되는 금요일 아침이면, 동네에서 옥천신문을 펼쳐서 보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옥천신문 봤어? 거기에 그 기사가 나왔잖아.” 이런 대화가 일상이었고요. 기자로서 뿌듯하기도 했지만, 시민의 한 사람으로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게 이런 거구나’하고 몸소 배울 수 있는 기회였어요.
하지만, 과거보다 신문에서 어떠한 이슈를 이야기했을 때 지면 밖에서의 파급력은 크게 약해져 갔어요. 어찌 보면 당연하죠. 명실상부, 온라인 세상이잖아요.(웃음) 다만, 오프라인 미디어에 몸 담은 기자로서 아쉬웠고 이 길이 맞는가 하는 고민이 들었던 거죠. 제가 기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기자를 꿈꾸는 사람들 모두가 그러하듯,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꿈 때문이었고 옥천신문을 택한 건 그게 지역사회 안에서 가능한 공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세상은 변했고, 그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한 거죠. 이제 더 이상 신문 혼자서 세상에 이슈를 던지고 변화시킬 수 없고, 신문 밖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그 움직임은 무엇일까’하는 고민이 계속 이어졌죠.
또 개인적으로는 옥천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알게 된,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 혹은 전교생이 10~20명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나 폐교 등에 관한 아카이빙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카이빙은 신문의 영역은 아니잖아요. 신문사에서 진행하기는 어렵고, 개인적으로 조금씩 아카이빙 활동에 참여하곤 했었죠. 하지만 신문사에 적을 둔 이상, 자유롭지 않더라고요. 개인적인 작업도, 밖에서 볼 때는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었달까요?
기자로서의 미래, 아카이빙이라는 새로운 관심, 이런저런 고민이 뒤섞이면서,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지를 차분히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죠. 그렇게 옥천신문을 퇴사하고 잠시 휴식기를 가졌죠.
‘그 움직임은 무엇일까’하는 고민이 계속 이어졌죠. Ⓒ탐방
함께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고래실에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왔어요. 기존에 매체를 만드는 일만 했다면, 고래실에서는 매체에 다양한 문화기획이 더해진 활동을 해나가고 있었죠. 제가 고민해 왔던 지면 밖의 움직임을 나름의 방식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팀이었어요. 두려움도 있었지만, ‘저기 가면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수 있고 조직에 기여도 하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합류했죠.
누리님은 고래실에서 옥천의 로컬매거진, <월간옥이네>의 편집장을 맡고 있습니다. <월간옥이네>는 2017년부터 시작해, 6년째 매달 발행되는 월간잡지이죠. 로컬매거진에서는 터줏대감이랄까요? 누리님이 <월간옥이네>의 첫 발간부터 함께하진 않았지만, 고래실에서 <월간옥이네>를 준비할 때 옥천신문 편집부장으로서 외부 준비위원을 맡아 소소한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 옆집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잡지이죠. Ⓒ탐방
<월간옥이네>는 옥천의 오만가지 이야기가 다 담길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해요. <월간옥이네>의 창간선언문에 보면, 역사에 남은 1%가 아니라 역사를 만든 99%의 사람들을 기록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 이야기처럼, 어떤 정치인, 기관, 단체장이 아니라 동네 사람, 옆집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잡지이죠. 그렇다고 꼭 가볍기만 한 건 아니예요. 지역에 필요한 이야기를 좀 더 긴 호흡으로, 둥글둥글하게 전하지만 그 안에 문제의식을 충분히 담고자 하고 있어요. 그리고 지면 밖, 다양한 활동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죠.
<월간옥이네>에서 ‘길고양이와 지역사회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하는 특집을 다룬 적이 있어요. 그리고 그 기사를 바탕으로 고래실에서 길고양이 보호 캠페인을 진행했죠. 참여했던 주민들을 중심으로 관련 정책의 필요성이 꾸준히 이야기가 됐고, 당시 군의회 의원님이 이러한 의견을 받아 동물보호조례안 제정에 나서기도 하셨죠. 그때 저희도, 캠페인에 참여했던 주민들과 함께 조례안에 대한 의견을 여러 번 전달하기도 했어요. 물론 모든 게 반영이 되진 않았지만, 조례안으로 옥천에서는 길고양이 중성화 사업이 진행되었어요. 작지만, 지면 기사와 지면 밖의 움직임이 함께 연결된 결과라고 생각해요.
또, <월간옥이네>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꼭지 중의 하나가 수몰마을 기록이에요. 대청댐이 생기면서 원래 살던 땅과 집을 버리고 이주해야 했던 아픔이 있는 곳이거든요. 마을이 수몰되면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신 분들도 있지만 기존 마을의 옆이나 위로 올라와서 사시는 경우가 많아요. 그분들을 만나서 과거 수몰마을의 이야기를 듣는 코너이죠. 연재를 계속하면서 수몰마을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주장을 꾸준히 해왔어요. 그 결과 옥천군에서 작년부터 수몰마을 기록사업을 진행하고 있죠. 물론 기록사업이 꾸준히 지속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겠지만, 매체가 문제를 제기하고 행정에서 그것을 받아들여 시행하고 있다는 게 나름 중요한 성과라고 생각해요.
주민들과 함께한 길고양이 보호 캠페인 Ⓒ고래실
결핍이 꼭 마이너스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작년 시골언니프로젝트 경험이 참 좋았어요. 로컬 미디어를 주제로, 1기, 2기, 3기, 각각 10명씩, 일주일간 진행했죠. 미디어 활동이라는 게, 사람을 직접 만나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과정에서 오해도 사라지고 서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니, 도시 여성들이 농촌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이 되겠다고 생각해서 만들었죠. 하지만 막상, 1기 시작할 때는 엄청 불안했어요. 우리는 의미도 있고 너무 재밌다고 생각해서 준비한 프로그램이지만, 여기 오신 도시 여성들이 ‘이게 뭐야’라고 생각이 들면 어떡하지 싶었거든요.(웃음) 결과적으로는 섣부른 걱정이었죠.
마지막 날에, 각자의 일주일간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어요. “세상에 이런 이야기가 있구나. 농촌이 이런 곳이구나. 몰랐던 것을 알아간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가 오갔죠. 농촌과 연결을 도와드리려 했는데, 역으로 저희가 더 큰 에너지를 받았던 것 같아요. 결국 마지막에는 다 같이 엉엉 울면서, ‘행복해요, 우리 서로 잊지 말아요.’라며 헤어졌죠.(웃음) 서로가 사는 지역, 방식은 다 다르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2030 여성이 가지고 있는 고민의 결이 맞닿았던 것 같아요. ‘나만 외로운 게 아니구나, 나만 고민하는 게 아니구나.’하는 위로와 위안을 얻은 느낌이었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핍이 꼭 마이너스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시골언니프로젝트에서 저희는 호스트의 역할로, 옥천에 있는 많은 시골언니를 연결하는 거잖아요. 옥천의 시골언니들이 항상 “여기 왜 온 거야? 왜 우리 이야기를 들으러 와? 우리가 도움이 된대?”하고 물어보셨거든요. 본인들의 삶이 도시 여성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불안하셨던 거죠. 걱정과 달리, 참여자분들은 “지역에 부족한 것들을 스스로 메우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참 좋았다”, “이렇게 멋진 사람들이 옥천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동네에도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 동네에서 그런 언니들을 찾아봐야겠다.” 라는 얘기를 해주셨어요. 이 이야기를 옥천의 시골언니들에게 전해 드렸더니 너무 기뻐하시더라고요. 나의 삶이 누군가에게 작지만,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경험인 거잖아요. 작년의 좋은 기억 때문에, 올해에도 옥천에서 어떤 분들과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지 더 기대되는 것 같아요.
결핍이 꼭 마이너스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탐방
생각해 보면 초, 중, 고, 대학교까지 16년 교육보다 옥천에서 살아가면서 몇 년간 배운 게 더 많아요. “이런 세계가 있구나, 이런 사람들이 있고, 이런 이야기가 있구나.” 취재를 나가는 매 순간 항상 그렇게 깨우쳤던 것 같아요. 때로는 ‘세상이 이럴 수 있다니.’ 감동하고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분노하기도 하면서요. 제가 13년간 옥천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옥천과 옥천에서 만난 사람들이에요. 모두가 저에게는 선생님이었거든요.
옥천에서 해왔던 일들이 대단하기보다는 13년 동안 이곳에서 살아 온 시간 자체가 큰 자원 같아요. 살아가며 알게 된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 또 자주 가는 공간들. 모든 게 얻게 된 자원이죠. 앞으로도 가능한 이 자원들과 제가 잘 어울리며 살아가고 싶어요.
사람들은 보통, 꿈을 찾아 큰 세상, 도시로 향합니다. 그러나 누리님은 전혀 다른 길을 택했어요. 내 꿈이 무엇인지, 또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그 꿈은 옥천에서 더 크게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역사회의 이야기를 글로 담아내는 기자에서, 이제는 지면을 넘어 실제 변화를 끌어내는 새로운 움직임까지 확장되고 있으니까요.
누리님과 대화를 마치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던 건 아닐까는 생각했어요. 내가 살고 싶은 삶,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인 먼저인데, 남들이 가는 길대로 무작정 따라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요. 탐방러 여러분은, 원하는 삶을 향해 잘 나아가고 있나요? 오늘 하루는 나의 방향을 점검해 보는 시간을 잠시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본 콘텐츠는 2023 시골언니프로젝트와의 협업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탐방이 추천하는 시골언니프로젝트
옥천군 | 박누리 (고래실)
인터뷰 ep.44
오랜만에 옥천에 갔어요. 팟캐스트 귤PD이자 사회적기업 고래실의 상윤님을 만나러 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지났네요. 오늘의 주인공은 상윤님의 동료인 누리님이예요. 누리님도 옥천이 고향은 아니래요. 지역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으로 와, 13년째 옥천살이 중이라네요. 도대체 옥천에 무슨 매력이 있기에, 또 어떤 꿈을 이루고 있기에 10년이 넘게 머무는 걸까요? <월간 옥이네> 편집장이자, 13년 차 옥천러 누리님을 만났습니다.
이건 운명이다.!
옥천에서 13년째 살고 있어요. 이곳에 오기 전에 옥천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어요. 유일하게 아는 거라곤 옥천신문이었죠. 언론정보학을 전공했거든요. 언론정보학 수업을 듣다 보면 옥천신문은 한 번쯤은 꼭 듣게 되는 이름이에요.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 미디어도 서울 중심이잖아요. 근데, 그 반대되는 지역 미디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꼭 언급되는 게 옥천신문이었죠. 지역 신문의 대표주자로 여겨졌달까요? 마침 마지막 학기에, 옥천신문에서 기자 채용공고가 떴어요. 기자가 되고 싶었고, 웬만하면 서울 중심보다는 지역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던 터라, ‘이건 운명이다’ 싶었죠.
처음에는 옥천에 정착하는 것보다 취재 기자로 적응하는 데 집중했던 것 같아요.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것도 벅찬 신입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옥천신문의 기자여서 지역사회에 안정적으로 그리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옥천신문 기자라는 명함이 제 신분을 보장해 주는 느낌이었죠. 또, 어린 여자애가 기자라면서, 혼자 카메라를 들고 왔다 갔다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할머니, 할아버지 눈에 신기하고 좋아 보이셨던 것 같아요. 그냥 그 모습 자체로 잘해주시기도 했어요. 시간이 지나서 신문에 박누리라는 이름을 달고 기사나 나가기 시작하니, 처음 보는 주민들이 “혹시 박누리 기자신가요?”하고 먼저 아는 척을 해주시더라고요. 우리 동네에 관해 쓴 기사 잘 봤다면서요. 이런 경험들이 참 좋았어요. 지역 미디어에서 일하는 매력과 보람을 톡톡히 느꼈죠.
지역 미디어에서 일하는 매력과 보람을 톡톡히 느꼈죠. Ⓒ탐방
옥천신문 기자로 9년을 보내고 나니, 고민이 생겨났어요. 가장 큰 고민은 예전만큼 신문을 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거였죠. 3~4년 차 때만 하더라도 옥천신문 발행되는 금요일 아침이면, 동네에서 옥천신문을 펼쳐서 보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옥천신문 봤어? 거기에 그 기사가 나왔잖아.” 이런 대화가 일상이었고요. 기자로서 뿌듯하기도 했지만, 시민의 한 사람으로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게 이런 거구나’하고 몸소 배울 수 있는 기회였어요.
하지만, 과거보다 신문에서 어떠한 이슈를 이야기했을 때 지면 밖에서의 파급력은 크게 약해져 갔어요. 어찌 보면 당연하죠. 명실상부, 온라인 세상이잖아요.(웃음) 다만, 오프라인 미디어에 몸 담은 기자로서 아쉬웠고 이 길이 맞는가 하는 고민이 들었던 거죠. 제가 기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기자를 꿈꾸는 사람들 모두가 그러하듯,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꿈 때문이었고 옥천신문을 택한 건 그게 지역사회 안에서 가능한 공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세상은 변했고, 그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한 거죠. 이제 더 이상 신문 혼자서 세상에 이슈를 던지고 변화시킬 수 없고, 신문 밖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그 움직임은 무엇일까’하는 고민이 계속 이어졌죠.
또 개인적으로는 옥천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알게 된,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 혹은 전교생이 10~20명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나 폐교 등에 관한 아카이빙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카이빙은 신문의 영역은 아니잖아요. 신문사에서 진행하기는 어렵고, 개인적으로 조금씩 아카이빙 활동에 참여하곤 했었죠. 하지만 신문사에 적을 둔 이상, 자유롭지 않더라고요. 개인적인 작업도, 밖에서 볼 때는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었달까요?
기자로서의 미래, 아카이빙이라는 새로운 관심, 이런저런 고민이 뒤섞이면서,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지를 차분히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죠. 그렇게 옥천신문을 퇴사하고 잠시 휴식기를 가졌죠.
‘그 움직임은 무엇일까’하는 고민이 계속 이어졌죠. Ⓒ탐방
함께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고래실에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왔어요. 기존에 매체를 만드는 일만 했다면, 고래실에서는 매체에 다양한 문화기획이 더해진 활동을 해나가고 있었죠. 제가 고민해 왔던 지면 밖의 움직임을 나름의 방식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팀이었어요. 두려움도 있었지만, ‘저기 가면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수 있고 조직에 기여도 하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합류했죠.
동네 사람, 옆집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잡지이죠. Ⓒ탐방
<월간옥이네>는 옥천의 오만가지 이야기가 다 담길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해요. <월간옥이네>의 창간선언문에 보면, 역사에 남은 1%가 아니라 역사를 만든 99%의 사람들을 기록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 이야기처럼, 어떤 정치인, 기관, 단체장이 아니라 동네 사람, 옆집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잡지이죠. 그렇다고 꼭 가볍기만 한 건 아니예요. 지역에 필요한 이야기를 좀 더 긴 호흡으로, 둥글둥글하게 전하지만 그 안에 문제의식을 충분히 담고자 하고 있어요. 그리고 지면 밖, 다양한 활동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죠.
<월간옥이네>에서 ‘길고양이와 지역사회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하는 특집을 다룬 적이 있어요. 그리고 그 기사를 바탕으로 고래실에서 길고양이 보호 캠페인을 진행했죠. 참여했던 주민들을 중심으로 관련 정책의 필요성이 꾸준히 이야기가 됐고, 당시 군의회 의원님이 이러한 의견을 받아 동물보호조례안 제정에 나서기도 하셨죠. 그때 저희도, 캠페인에 참여했던 주민들과 함께 조례안에 대한 의견을 여러 번 전달하기도 했어요. 물론 모든 게 반영이 되진 않았지만, 조례안으로 옥천에서는 길고양이 중성화 사업이 진행되었어요. 작지만, 지면 기사와 지면 밖의 움직임이 함께 연결된 결과라고 생각해요.
또, <월간옥이네>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꼭지 중의 하나가 수몰마을 기록이에요. 대청댐이 생기면서 원래 살던 땅과 집을 버리고 이주해야 했던 아픔이 있는 곳이거든요. 마을이 수몰되면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신 분들도 있지만 기존 마을의 옆이나 위로 올라와서 사시는 경우가 많아요. 그분들을 만나서 과거 수몰마을의 이야기를 듣는 코너이죠. 연재를 계속하면서 수몰마을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주장을 꾸준히 해왔어요. 그 결과 옥천군에서 작년부터 수몰마을 기록사업을 진행하고 있죠. 물론 기록사업이 꾸준히 지속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겠지만, 매체가 문제를 제기하고 행정에서 그것을 받아들여 시행하고 있다는 게 나름 중요한 성과라고 생각해요.
주민들과 함께한 길고양이 보호 캠페인 Ⓒ고래실
결핍이 꼭 마이너스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작년 시골언니프로젝트 경험이 참 좋았어요. 로컬 미디어를 주제로, 1기, 2기, 3기, 각각 10명씩, 일주일간 진행했죠. 미디어 활동이라는 게, 사람을 직접 만나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과정에서 오해도 사라지고 서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니, 도시 여성들이 농촌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이 되겠다고 생각해서 만들었죠. 하지만 막상, 1기 시작할 때는 엄청 불안했어요. 우리는 의미도 있고 너무 재밌다고 생각해서 준비한 프로그램이지만, 여기 오신 도시 여성들이 ‘이게 뭐야’라고 생각이 들면 어떡하지 싶었거든요.(웃음) 결과적으로는 섣부른 걱정이었죠.
마지막 날에, 각자의 일주일간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어요. “세상에 이런 이야기가 있구나. 농촌이 이런 곳이구나. 몰랐던 것을 알아간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가 오갔죠. 농촌과 연결을 도와드리려 했는데, 역으로 저희가 더 큰 에너지를 받았던 것 같아요. 결국 마지막에는 다 같이 엉엉 울면서, ‘행복해요, 우리 서로 잊지 말아요.’라며 헤어졌죠.(웃음) 서로가 사는 지역, 방식은 다 다르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2030 여성이 가지고 있는 고민의 결이 맞닿았던 것 같아요. ‘나만 외로운 게 아니구나, 나만 고민하는 게 아니구나.’하는 위로와 위안을 얻은 느낌이었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핍이 꼭 마이너스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시골언니프로젝트에서 저희는 호스트의 역할로, 옥천에 있는 많은 시골언니를 연결하는 거잖아요. 옥천의 시골언니들이 항상 “여기 왜 온 거야? 왜 우리 이야기를 들으러 와? 우리가 도움이 된대?”하고 물어보셨거든요. 본인들의 삶이 도시 여성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불안하셨던 거죠. 걱정과 달리, 참여자분들은 “지역에 부족한 것들을 스스로 메우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참 좋았다”, “이렇게 멋진 사람들이 옥천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동네에도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 동네에서 그런 언니들을 찾아봐야겠다.” 라는 얘기를 해주셨어요. 이 이야기를 옥천의 시골언니들에게 전해 드렸더니 너무 기뻐하시더라고요. 나의 삶이 누군가에게 작지만,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경험인 거잖아요. 작년의 좋은 기억 때문에, 올해에도 옥천에서 어떤 분들과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지 더 기대되는 것 같아요.
결핍이 꼭 마이너스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탐방
생각해 보면 초, 중, 고, 대학교까지 16년 교육보다 옥천에서 살아가면서 몇 년간 배운 게 더 많아요. “이런 세계가 있구나, 이런 사람들이 있고, 이런 이야기가 있구나.” 취재를 나가는 매 순간 항상 그렇게 깨우쳤던 것 같아요. 때로는 ‘세상이 이럴 수 있다니.’ 감동하고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분노하기도 하면서요. 제가 13년간 옥천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옥천과 옥천에서 만난 사람들이에요. 모두가 저에게는 선생님이었거든요.
옥천에서 해왔던 일들이 대단하기보다는 13년 동안 이곳에서 살아 온 시간 자체가 큰 자원 같아요. 살아가며 알게 된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 또 자주 가는 공간들. 모든 게 얻게 된 자원이죠. 앞으로도 가능한 이 자원들과 제가 잘 어울리며 살아가고 싶어요.
사람들은 보통, 꿈을 찾아 큰 세상, 도시로 향합니다. 그러나 누리님은 전혀 다른 길을 택했어요. 내 꿈이 무엇인지, 또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그 꿈은 옥천에서 더 크게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역사회의 이야기를 글로 담아내는 기자에서, 이제는 지면을 넘어 실제 변화를 끌어내는 새로운 움직임까지 확장되고 있으니까요.
누리님과 대화를 마치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던 건 아닐까는 생각했어요. 내가 살고 싶은 삶,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인 먼저인데, 남들이 가는 길대로 무작정 따라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요. 탐방러 여러분은, 원하는 삶을 향해 잘 나아가고 있나요? 오늘 하루는 나의 방향을 점검해 보는 시간을 잠시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본 콘텐츠는 2023 시골언니프로젝트와의 협업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탐방이 추천하는 시골언니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