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체가 달라진 삶을 살고 있어요.

경상북도 상주 | 장혜주 (치커리바게트)

  인터뷰 ep.34  



어릴 적 바다 그리기 대회에 나간 적이 있어요. 돗자리를 깔고 앉아 크레파스와 물감으로 눈 앞에 펼쳐지는 바다를 그렸죠. 상을 받진 못했지만, 꽤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내가 사는 지역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그려본 건 처음이었거든요. 지역 역시 자세히,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더라고요.

오늘의 주인공 혜주님은 자연스레 살아가는 곳, 상주를 그리게 된대요. 일상의 풍경이 되었기 때문이라며 특별한 일이 아닌 듯 이야기했죠. 하지만 그런 단순한 이유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림을 설명하는 글에서 혜주님이 상주에서 쌓은 추억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게 느껴졌거든요. 상주살이에 푹 빠져있는 혜주님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어요.


치커리 혜주님의 작업실 Ⓒ탐방


내 걸 하고 싶어졌어요.


서울에서 14년 동안 한 직장을 다녔어요. 참 길죠.(웃음) 10년 넘게 디자인을 했는데도 내 것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그 사실이 어느 순간엔 허무하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그때쯤부터 내 걸 하고 싶다는 꿈을 조금씩 가졌던 것 같아요. 하지만 서울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시작하기엔 기회비용이 너무 클 것 같았죠. 작업실을 구하는 것부터 큰돈이 드니까요. 두려운 마음에 몇 년을 생각만 하며 흘려보냈어요.


부모님이 6년 전쯤 상주로 귀촌하셨어요. 저도 부모님을 뵈러 상주에 오가게 됐죠. 몇 번 오가니 상주도 꽤 가깝더라고요.(웃음) ‘나도 여기 내려와서 살면 어떨까?’ 하고 상상하게 됐죠. 상대적으로 적은 기회비용도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지역에서 살아보는 경험도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곳에 갈 수는 없으니 서울 근교? 부모님이 계시는 상주? 다양한 고민을 하게 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삶을 바꾸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예열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지니 자연스럽게 상주에 눈길이 가더군요. 특히 상주에서 자신의 브랜드나 공간을 운영하는 분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게 됐죠. 그러던 중 상주에서 디자이너로 일할 기회가 생겼어요. 무엇보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자신이 있었죠. 삶을 바꾸기 위한 여러 고민을 하던 때에 길이 보인 거예요. 일단은 살아보고 결정하자는 마음으로 상주살이에 첫발을 내디뎠답니다.


상주살이에 첫발을 내디뎠어요. Ⓒ탐방


상주에서 디자이너로 계약이 끝날 때쯤, 정착을 결심하고 어떤 일을 하면서 살까 고민했어요. 나만의 일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거죠. 우선 새로운 이름을 하나 갖고 싶었어요. 삶을 완전히 바꾼 만큼,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거든요.(웃음) 고민하던 중 ‘치커리’라는 채소 이름이 마음에 들어왔어요. 치커리가 요리에 있어 메인으로 쓰이는 재료는 아니잖아요. 곁들여 먹었을 때 식감을 돋우는 재료에 가깝죠. 그런 부분이 저와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앞에 나서서 주도하기보단 곁에서 뒷받침하는 편이거든요.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함께 있으면 매력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치커리라는 이름을 짓게 됐어요.


아무래도 1인 창작자다 보니 무언가를 대량 생산을 하는 건 어렵겠더라고요. 자본금이 많이 필요하고, 리스크도 많이 떠안아야 하니까요. 그때 실크스크린이 떠올랐어요. 노동력만 있으면 1장이든 100장이든 찍을 수 있는 작업이거든요. 또, 수작업하는 걸 좋아하니 여러모로 딱 맞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실크스크린과 드로잉을 하는 브랜드 ‘치커리 바게트’를 열게 됐답니다.


실크스크린과 드로잉을 하는 치커리 바게트를 열었어요. Ⓒ탐방



삶의 변화가 그림에 투영되는 것 같아요. 


일상을 그려요. 상주에 오고 나니 자연스레 상주를 배경으로 한 그림들이 생기더라고요. 상주를 보여줘야겠다고 작정한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상주에서 누리게 된 것들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은연중에 있었던 것 같아요. 도시보다 확연히 많이 누릴 수 있는 자연이나 여유, 편안함과 평화로움 같은 걸 전하고 싶었달까요?


어느 순간부터 그림체가 변했다는 얘기를 들어요. ‘독앤미(dog and me)’ 시리즈만 봐도 변화가 느껴지거든요. 독앤미는 회사에 속해 있을 때부터 시작된 반려견과의 시간을 담은 그림 시리즈예요. 회사를 나온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작업이죠. 하지만 분위기가 많이 달라요. 예전엔 저와 강아지라는 객체에 집중한 그림이었다면, 상주에 와서는 자연에 속해 있는 모습을 그리게 되었거든요. 삶의 변화가 그림에 투영되는 것 같아요.


그림체가 변한 혜주님의 그림 Ⓒ탐방


독앤미 상품을 4~5년 꾸준히 만들었지만, 팬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그래서 퇴사 후 개인적으로 독앤미 캘린더 제작을 할까 말까 고민했어요. 구매하는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됐거든요. 그런데 의외로 좋아해 주시는 분이 많더라고요. 기다렸다고 하시는 분부터 예전부터 구매했다고 하시는 분, 심지어 큰 크기의 캘린더가 나오지 않아 아쉽다고 말씀하시는 분까지. 독앤미를 사랑해주는 분들이 계신다는 걸 몰랐던 거예요. 정말 감사하고 기뻤죠. 행복했고요!


상주에서 공간*을 열고 나니 그런 경험이 더 많아졌어요.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 표현해 주시니 좀 더 와닿고요. 처음엔 손님들이 제 그림을 보는 모습조차 쳐다보지 못했어요. 갑자기 딴 일을 하고 어색하게 먼 산을 바라보고요.(웃음) 너무 쑥스러웠거든요. 그림이 좋다고 말씀해 주시면 “아니에요. 저 그렇게 잘 그리지 않아요.”라고 말하기 일쑤였죠.


그런데 어느 날 라킷키 작가님이 조언해주었어요. 보시는 분이 좋다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쑥스러워하는 건 실례일 수도 있다고요. 제 그림을 좋다고 생각해서 이야기하고 제품을 구매한 것인데,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자신감이 없다니. 자신감 있는 마인드로 셋업 하는 게 필요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겠더라고요. 그 이후로는 그런 마인드를 갖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혜주님은 라킷키님(조우리), 노니님(박은정)과 함께 ‘플랫터’라는 공간을 운영합니다. 플랫터가 있는 건물 1층에는 혜주님의 작업실, 치커리 바게트가 있습니다.


1층에 자리 잡은 혜주님의 작업실과 2층에 위치한 플랫터 Ⓒ탐방



아직은 서울이 더 익숙해요.


“기회만 생기면 나를 소개해주려고 하는 동료들이 있고, 내가 딛는 한 발 한 발 응원을 보태주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겼다.” - 혜주님 인스타그램 中


상주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엽서 하나를 그려서 SNS에 올렸을 뿐인데, 동료들이 생각지 못하게 많은 관심을 주더군요. 자신의 가게에서 팔아주겠다며 가져오라고 하고, 다른 곳에 입고할 수 있지 않을까 저보다 먼저 고민하기도 했죠.(웃음) 동료들이 제가 무언가 하면 다 좋다고 해주고, 잘될 것 같다고 해주는 거예요. 물론 서울 친구들도 응원해줬지만, 느낌이 좀 달랐어요. 열과 성을 다한 응원이었죠. 상주에 제 역할이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려는 것 같았어요. 상주에 온 저와 함께 살아보려는 그들의 마음이 참 고마웠죠. 정착하는 데 큰 힘이 되기도 했고요.


가끔 서울에 가요. 그런데 상주보다 더 익숙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매캐한 공기마저요.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럴 때 생각해요. “서울에서 30년 넘게 살았던 내가 왜 상주에 살고 있지?”하고요. 서울에 가야 비로소 상주로 이주했다는 걸 실감하는 거죠. 귀촌 선배들에게 물으니 귀촌한 지 1~2년 됐을 땐 저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상주 사람이 되긴 아직 멀었나 봐요!(웃음)


치커리바게트의 혜주님 Ⓒ탐방



시골에 사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면 자연스레 귀촌을 생각하게 되지 않나요? 실제로 귀촌을 결심하기도 하고요. 부모님을 뵙기 위해 상주에 오가다 결국 귀촌한 혜주님처럼요. 어쩌면 우린 경험이 없기 때문에 시골살이를 어렵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몰라요. 그렇기에 탐방은 계속해서 로컬의 삶을 전하려고 해요. 로컬을 너무 멀게 생각하지 않길 바라거든요!

상주에서 만난 우리님, 은정님, 혜주님은 닮은 부분이 많았어요. 서울을 떠나왔고, 상주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따뜻한 시선으로 상주를 바라본다는 것. 혹시 눈치채셨는지 궁금해요. 이 세 분 사이에 끈끈한 관계가 있다는 걸요! 사실 이 세 분은 각자의 일을 하고 있지만, 플랫터라는 팀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기도 해요. 그 이야기도 곧 전해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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