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술, 사람이 함께 익어가고 있어요.

서울특별시 | 전유겸 (책, 익다)

  인터뷰 ep.26  



매년 작성하는 위시리스트에는 ‘독서하기’가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어요. 하지만 매번 실패합니다. 퇴근 후 저녁 먹고 씻고 핸드폰을 조금 하다 보면 잘 시간이더라고요. 어느 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책을 읽으러’ 카페에 갔어요. 하지만 사람들로 북적여 집중이 되지 않더라고요. 결국 금방 책을 덮었습니다.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 없을까요?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북펍’을 알게 되었어요. BOOK + PUB, 책과 술이 함께 있는 공간이랍니다.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다니. 생소하네요. 그래도 되는 건가 싶고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북펍이 있다는 홍대입구로 향했어요. 골목에서 골목으로 이동하다 보니 익숙한 간판이 보여요. 책과 와인이 그려진 ‘책, 익다’예요. 유겸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시네요.


조용한 골목에 자리 잡은 책, 익다 Ⓒ탐방



낮엔 회사원, 밤엔 서점 주인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결론은 책과 술이었죠. 그런데 책 읽기를  좋아한다면서 독서시간은 너무 적더라고요. 좋아하는 책과 술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그럼 운영을 해보자 싶었죠.


주변 사람들에게 계획을 말했어요. 다들 반대했죠.(웃음) 요즘 책도 안 읽는데 그런 공간에 누가 오겠냐고요. 또 술을 마시면서 책 읽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이야기도 들었죠. 사실 예상했던 반응이었어요. 책은 집중해서 봐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잖아요. 하지만 저는 술과 책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술이 때론 몰입을 도와주거든요. 지인들이 반대할수록 공간을 열겠다는 생각이 강해졌어요. 저와 같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게 더 좋겠다 싶었고요.


유겸님이 좋아하는 책과 술, 그리고 사람들로 채워진 공간 Ⓒ탐방


코로나가 가장 심할 때 가게 문을 열었어요. 코로나의 극심한 유행과 격리는 내 의사와 관계없이 우리를 혼자 있게 만들었잖아요. 코로나 블루를 겪는 분도 많았고요.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혼자 있고 싶다고 하면서 굳이 밖에 나가요. 카페나 도서관처럼 사람이 있는 공간에 나가는 거죠. 그건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해요. 혼자 오더라도 옆에 사람이 있으면 왠지 안도감이 들죠. 나와 비슷한 취향이나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으면 위로받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책, 익다’가 그런 공간이고 싶었어요. 그래서 코로나와 관계없이, 아니 코로나가 심할수록 최대한 빨리 열어야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렇게 낮엔 회사원, 밤엔 서점 주인의 삶을 살게 되었네요.


유겸님은 낮에는 회사를 다니고 밤에는 서점을 운영해요. 그래서 책, 익다의 문은 평일엔 오후 7시부터 11시까지, 주말엔 오후 3시부터 11시까지 열어요.


낮엔 회사원, 밤엔 서점 주인으로 살게 되었어요. Ⓒ탐방



책 읽고, 술 익고, 사람이 있는 곳


‘익다’라는 단어를 좋아해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술이 익는 것처럼 책도 오래될수록 점점 익어가는 느낌이에요. 책을 한 권 읽었다고 바로 지식이 쌓이진 않잖아요. 여러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속에 뭔가가 천천히 쌓이는 거죠. 그리고 어느새 나 자신이 변화했음을 느끼고요. 그런 의미를 담아 책 읽고, 술 익고, 사람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책, 익다’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가장 신경 쓴 건 위치예요. 조용하고 외부 소음으로부터 노출이 안 되길 바랐거든요. 특히 오토바이 소음은 꼭 피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최대한 안쪽에 있는 건물을 찾았죠.


두 번째는 조명이에요. 책을 읽는 공간이기 때문에 너무 밝거나 어두우면 안 되죠. 사실 약간 어둡게 하는 게 더 분위기가 좋은데, 더 어둡게 했다가는 눈이 상할 것 같아서 적당하게 조절했어요.(웃음)


세 번째는 편안한 분위기요. 이꼼이가 그래서 들어왔어요. 처음으로 혼자 가는 공간에 아무도 없으면 불편하잖아요. 신기하게 혼자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이꼼이 앞에 앉아요. 이꼼이가 책, 익다의 영업사원이죠.(웃음)


책, 익다의 영업사원 이꼼이 Ⓒ탐방


어떻게 여기에 오시는지 늘 궁금해요. 인스타그램 이외에는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거든요. 대체 어떻게 찾아오셨냐고 정말 물어보고 싶지만, 혼자 오신 분들에게는 그 질문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혼자 있을 공간을 찾아서 온 건데 자꾸 주인이 말을 거는 건 실례일 수 있잖아요. 궁금한 마음을 최대한 참다가 다른 손님이 없을 때나 계산하실 때 살짝 물어봐요.(웃음) 먼저 말씀해 주시는 분들도 종종 계세요. 특히 멀리서 오신 분들은 꼭 알은체를 하시죠. 서울 온 김에 왔다면서 너무 좋다고요. 그럴 때 참 기분이 좋죠.


한 번은 나이가 지긋하신 부부가 오셨어요. 그런데 책은 안 읽으시고 자꾸 두리번 거리시는 거예요. 왜 그러실까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딸을 기다리신 거였어요. 책, 익다의 단골인 따님은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 혼자 살고 있어요. 본인이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에 부모님을 꼭 모시고 오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께서 제 두 손을 꽉 잡으면서 고맙다고 인사하셨어요. 그게 기억에 남아요.


손님들이 스스로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는 것 같아요. 제가 한 거라곤 공간을 열었다는 정도일까요? 책, 익다에는 날적이(여러 명이 돌아가면서 쓰는 공통일기)가 있어요.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적는 날적이와 질문을 이어가는 날적이가 있죠. 질문을 이어가는 날적이에는 본인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질문으로 남겨두면 다음 사람이 답을 하는 거예요. 릴레이식 문답이죠. 자신의 질문에 다른 사람들이 어떤 답을 남겼는지를 보려고 또 오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렇게 왔다가 또 질문을 남기고 가시고요.


책, 익다에서는 날적이를 통해 사람과 사람이 연결돼요. Ⓒ탐방



사람들과 함께 익어가요.


글을 써보고 싶었어요. 저는 글을 잘 쓰지도, 배우지도 않았지만요.(웃음) 막상 글을 쓰려 하니 어떻게 써야 될지 모르겠더군요. 혼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모임을 열었어요. 그게 ‘글쓰기, 익다’예요. 글을 써보고 싶은데 어려워서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당신도 글을 써볼 수 있다’고 응원을 해주는 모임이죠. 몇 번 진행해 보니 장기적으로 진행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 ‘글쓰기 오래, 익다’라는 모임도 만들었어요. 이곳에는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은 분들이 많이 찾아오세요. ‘글쓰기, 익다’보다 본격적인 모임이랄까요?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은 사람이 모이는 ‘글쓰기 오래, 익다’ Ⓒ책, 익다


‘글쓰기 오래, 익다’는 미리 정해진 글감으로 글을 미리 써와야 해요. 글감은 버스나 언덕 같은 사물일 때도 있고, 비추다 같은 추상적인 단어일 때도 있죠. 그러다 보니 정말 다양한 글이 나오더라고요. ‘인생에서 가장 기억나는 것은?’ 같은 주제를 드렸다면 한정적인 이야기가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짧은 글감을 던지니 재밌게도 어떤 분은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어떤 분은 가벼운 이야기를 써오세요.


작성한 글은 모임 전날 밤 9시에 올려요. 미리 다 썼다고 올리는 게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일괄적으로 올리죠. 그래야 모두가 글을 다 쓴 상태에서 남의 글을 볼 수 있어요. 혹여나 누군가가 글을 다 썼다고 먼저 올리면, 자신의 글과 비교하면서 쓰기도 전에 맥이 빠질 수 있잖아요. 그래서 글 올리는 시간을 통제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써 온 글을 읽어오는 것까지가 숙제예요. 그리고 모임 시간 동안은 서로의 글에 대해 피드백을 해요. 어떤 부분이 이상하다고 콕 집기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어떤 표현이 좋고, 어떤 연결이 좋다고 말하는 거죠. 이렇게 제한 있는 비평을 해야 모두가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새로운 모임이 계속 생겨날 책, 익다 Ⓒ탐방


저는 모든 사람이 주연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자주 남과 비교하곤 하잖아요. 그러지 않고 오롯이 나로서 설 수 있기를 바라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때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나의 삶도 괜찮구나~’ 하면서 위로받을 수 있거든요.


영화를 함께 보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영화, 익다’부터 책을 읽고 감상평을 나누는 ‘독서, 익다’, 와인을 함께 마시는 ‘와인, 익다’까지. 다양한 모임을 운영하는 이유죠. 최근에는 ‘꿈, 익다’라는 새로운 모임도 준비하고 있어요. 제가 회사 생활을 하면서 서점을 운영하고 있잖아요. 강의도 하고 있고요. N잡을 꿈꾼 건 아닌데, 좋아하는 걸 쫓다 보니까 이렇게 됐죠.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걸 많이 할수록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걸 전하고 싶어요. 고민을 함께 나누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책, 익다에는 새로운 모임이 계속 생겨날 거예요.


책, 익다의 유겸님 Ⓒ탐방



책, 익다의 꿈은 커뮤니티가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마음 편히 모여 서로 이야기 나누고 정보도 공유하는 공간이 되는 거죠. 이제 월요일은 모임만 하는 날로 바꾼다니, 더 다양한 모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네요. 앞으로는 또 어떤 주제들과 사람들이 익어갈까요?


여러분의 동네에 책, 익다를 닮은 장소가 있는지 궁금해요. ‘책, 익다’처럼 집도 직장도 아니지만 편안하고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를 바로 ‘제3의 장소’라고 해요. 동네에 이런 공간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웃들과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죠. 그런 장소가 있다는 것 자체로 동네에 대한 애정이 커질 테고요. 아직 여러분만의 제3의 장소가 없다고요? 그렇다면 오늘부터 천천히 찾아보세요. 분명히 동네와 더 친해지고, 동네를 더 좋아하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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