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머들에서 제주다움을 발견했어요.

  로컬선발대 ep. 22 

제주도 │ 정지솔 (오두제)



제주로 늦은 휴가를 떠났어요. 코로나 이후로 제주 여행이 더 성황이라고 하더니 비수기, 평일에도 사람이 참 많더라고요. 느긋하게 자연을 느끼고 싶었는데 아쉽다고 생각하며 길을 걷다 보니 현무암으로 쌓인 돌무더기가 보입니다. 머들. 제주말로 돌무더기를 부르는 말이죠. 사실 저는 이 예쁜 단어를 ‘머들 크레용’이라는 상품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제주에 온 김에 저에게 머들을 알려준 지솔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지솔님의 아지트가 있는 소박한 제주 마을입니다. 사람이 가득한 관광지가 아닌 진짜 제주의 삶. 이제야 제가 원하던 휴가 같네요.


소박한 제주 마을에 자리 잡은 지솔님 Ⓒ탐방 



살아본 경험은 정말 특별했어요.


제주도는 2020년 추석에 내려왔어요. 그전에는 서울, 을지로에서 작은 초상 사진관을 운영했죠. 사진관을 오픈하고 얼마 안 되어 코로나가 터졌고 아예 손님을 받을 수 없게 되어버렸죠. 그렇게 아무도 없는 스튜디오에서 동업자와 커피를 마시면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인스타그램에 ‘넥스트 로컬’이라는 서울시의 지원 사업 광고가 뜬 거예요.


그날 바로 신청했어요. 사업계획서 같은 걸 한 번도 써본 적은 없지만 멍하니 있는 지금보다 재밌을 것 같았죠. 신청할 때 지역을 선택해야 하더라고요. 바로 제주를 선택했어요. 섬이라는 물리적으로 고립된 환경이 주는 로맨틱함에 끌렸달까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즉흥적이에요.(웃음)


2차까지 통과하니 주변 지원자들이 보이더라고요. 모두가 굉장히 빠르게 치고 나가는 느낌이었어요. 진짜 사업을 하는 것 같았죠. 그 속에서 저만 장난 같아 보였달까요? 한 번도 제 사업을 해본 경험이 없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혼란스러웠어요. 그러다 ‘그런데도, 이때까지 남은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 사람들이 나를 뽑은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다른 사람보다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지역의 자원을 활용해서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창업’이라는 넥스트 로컬의 핵심 가치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건, 바로 ‘나’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섬이라는 물리적으로 고립된 환경이 주는 로맨틱함에 끌렸어요. Ⓒ탐방


넥스트 로컬에서 2주 정도의 조사 활동 기간이 있었어요. 여행이 아닌 목적으로 제주도를 와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짧았지만 제주에서 살아본 경험은 정말 특별했어요. 조사 활동 기간의 대부분은 제주도에서 유명한 여러 곳의 박물관과 미팅을 하면서 집중적으로 조사를 했어요. 그리고 이틀 정도는 놀았는데, 아이러니하게 그 이틀 동안 모든 인사이트를 얻었죠. 관광객끼리 논 게 아니라 로컬이랑 놀았어요.(웃음)


안내자를 통해서 제주도를 접할 수 있었는데, 그때 제가 알던 제주도가 다가 아니라는 걸 느꼈어요. 사실 관광지로서 제주도는 아주 세련됐잖아요. 제주도에서는 서울 못지않은 커피를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고, 서울보다 더 많은 맛집이 있잖아요. 그래서 문화적으로 뒤처져 있다고 생각을 못 했었는데, 안내자분이 사는 동네와 집에 가보니까 정말 시골 같았어요. 하지만 그게 너무 좋고, 매력 있었죠. 제가 그런 시골 바이브를 되게 좋아해요. 첫눈에 반했고, 더 알아보고 싶었어요.


하루는 금능해변을 소개해 주셔서 밤새 누워서 별을 봤어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별똥별을 봤는데, 100개 넘게 계속 떨어지더라고요. ‘여기는 정말 말이 안 되는 곳이다. 여기서 살고 싶다.’라는 생각뿐이었어요. 바로 그 다음 주에 서울의 전셋집을 내놓고 내려왔어요. 선정되기 전인데, 무작정 내려온 거죠.(웃음)


주변 지인들은 지원 사업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전셋집을 정리하냐고 만류했어요. 하지만 어딘가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처음 해봤거든요. 꼭 살아봐야겠다 싶었죠. 원래 자연에서 영감을 크게 받는 사람이라 제주도에는 제가 찾고 싶었던, 하고 싶었던 일이 있을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을지로 스튜디오도 정리하고 바로 내려왔답니다.


제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조사했던 지솔님 Ⓒ오두제



내가 해야겠다, 재밌겠다!


처음에는 시아노타입(Cyanotype, 청사진)이라는 사진 콘텐츠와 제주도 자생식물을 엮어서 제주의 콘텐츠 회사를 만들려고 했었어요. MVP 테스트*를 하고 제품도 만들었는데, 넥스트 로컬에 적합한 콘텐츠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제주도에 끼워 맞춘 느낌이 강하게 들었죠.


바꾸기로 했죠. 아주 심플하게 접근했어요. ”진짜 제주도다운 기념품을 하나 만들어보자!”는 거였죠. 기념품 덕후여서 뮤지엄 같은 곳에 가면 꼭 굿즈를 사 오는 편이에요. 그런데, 제주도에는 살 게 너무 없더라고요.(웃음) 그럼, ‘내가 해야겠다, 재밌겠다!’ 싶었죠. 그렇게 제주도의 자원을 활용해서 제품을 만들게 되고 제주도의 문화를 알리는 제품을 만들게 되었어요.


* MVP는 Minimum Viable Product, 최소기능제품이란 뜻으로 완전한 서비스가 아닌, 핵심 기능만을 만들어서 발전시켜나가는 테스트 방법 


가장 제주다운 오브제, 머들 크레용 Ⓒ오두제


가장 큰 인사이트를 줬던 곳은 돌문화공원이에요. 가보시면 규모에 깜짝 놀라실 거예요. 월드컵 경기장 3개 정도 되는 엄청난 규모인데, 그게 다 돌로 되어 있거든요. 돌 조각상, 문화재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죠.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돌하르방만 알고, 많이 알아봤자 돌담, 정낭까지 밖에 모르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가니까 너무 귀엽고 예쁘고 특별한 돌 문화가 넘치더라고요.


박물관에서는 문화를 많이 소개하고 있지만 관광객의 니즈에 맞춰서 소개하지는 못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톤만 좀 맞춰보면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너무 좋은 자원이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가공할지만 고민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죠.


제주의 돌 문화 중에서도 머들이 참 좋았어요. 머들은 제주도 말로 돌무더기를 말하는데요. 제주도에 돌담만큼이나 많은 게 머들이에요. 너무 흔히 볼 수 있는 건데 제 기능이 없어요. 밭담은 밭과 밭의 경계를 나누고 정낭은 대문의 기능을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머들은 정말 쓸모가 없는 아이였죠.


쓸모가 없으면 덩어리나 더미라고 하지, 굳이 이름을 붙였더라고요. 제주 사람들이 머들을 부른 이름이 머들, 베케, 머돌 등 5가지가 넘어요. 굳이 이름을 붙여서 부른다는 건 일종의 애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애정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를 알아보기 시작했죠. 한 3~4일동안 구글링과 서적 찾는 것에 몰두했어요. 서적을 찾을 때는 거의 살다시피 했죠. 그런데 어디에서도 돌무더기 이상의 설명을 발견할 수 없었어요. 좌절했죠. 나한테는 아주 특별하게 다가왔는데, 그냥 쓸모없는 돌무더기가 끝이라니요.(웃음)


마인드컨트롤이 시작됐죠. ‘아니야, 의미는 있잖아. 기능은 없지만, 의미는 있을 수 있잖아.’하고요. 그리고 정해진 게 없으니 그 의미는 제 생각하는 대로 정의를 내려도 되겠다 싶었죠. 쓸모없지만 제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 어찌 보면 머들이야말로 가장 제주다운 오브제라고 생각했어요.


벽 한 켠에 놓이기만 하는 기념품은 싫었어요. 머들을 어떻게 경험하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쓰임을 만들자는 생각을 했죠. 돌과 어울리는 쓰임을 생각하다가 크레용이 떠오른 거예요. 그렇게 머들 크레용이 탄생했죠. 쓸모를 찾아주려고 하다 보니까 꽤 어울리는 쓸모를 찾은 것 같아요.



재밌는 제주 이야기도 있는데 들어보실래요?


어느 날, 뜬금없이 해외에서 이메일이 왔어요. 저희가 상을 받았다고요.(웃음) 메일을 읽어봤더니, 저희가 2021년 아시아에서 패키지가 제일 예쁜 브랜드로 선정이 됐다는 거예요. 제출한 적도 없는데 상을 준다니! 고맙게 받았죠.(웃음) 그렇게 오두제의 머들 크레용이 그 사이트에 게재되니 해외 디자이너들이 하나둘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 국적이 다양하더라고요. 그때 생각했죠. ‘어쩌면 오두제가 해외에서도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해외 시장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메종 오브제라는 박람회에 참가했어요. 결과는, 국내보다 훨씬 폭발적이더라고요. 바로 12개국에 수출하게 되었죠. 해외 박람회로 얻은 인사이트는 ‘로컬 콘텐츠가 통한다’와 동시에 ‘로컬 콘텐츠가 중요하지 않다’는 거였죠.


메종오브제 박람회에 참가했던 오두제 Ⓒ오두제


그 사람들은 지나가다가 부스에 있는 제품을 보고 발걸음을 멈춰 섰던 건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오두제가 로컬 콘텐츠라는 걸 알게 된 거잖아요. 디자이너나 브랜드 관련 일을 하시는 분들은 로컬 콘텐츠에 대해서 더 깊게 알고자 하지만, 바이어들은 그동안 봤던 크레용 중에 가장 귀엽다는 것에 집중했어요. 오히려 예쁘고, 재료가 좋다는 점에 주목받게 되면서 로컬은 ‘내수용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반면에, 제주도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볼캐닉 아일랜드(volcanic island), 화산섬이라고 표현했는데, 볼캐닉 아일랜드에서 오신 분들은 멈춰서서 우리나라에도 동자석이 있다며 좋아하시더라고요. 직접 핸드폰으로 본인 나라의 동자석 같은 걸 보여주신 분들도 많았어요. 저는 제주도라는 지역만을 소개하려고 했던 건데, 어느새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더군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했던 이유는 제주도라는 아주 좁은 지역에서 자신들과의 공통점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어요. 바로, 로컬 콘텐츠의 힘인 거죠.


해외 박람회 경험으로, 저는 오히려 더 가벼워졌어요. 처음에는 브랜드 진정성을 어필하고 싶어서 제주도 사람들을 대변하는 크레용이라고 엄청 무겁게 표현했었는데, 이제는 진짜 귀여운 크레용이라고 편하게 얘기하죠. 제품으로서만 접점을 만들고, 여기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한테는 진짜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가고자 하는 방향에 변함은 없으나 순서만 조금 바뀌게 되었달까요? ‘귀여운 크레용입니다. 근데 재밌는 제주 이야기도 있는데, 들어보실래요?’ 이렇게요.


오두제 스튜디오 한편에 있는 동자석 Ⓒ탐방



뭐함꽈?


제가 생각하는 제주다움은 사실 멋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한림항 쪽에 사는데, 아침에 해장하러 많이 가는 순댓국밥집이 있어요. 선원분들도 조업을 끝내고 오셔서 아침 겸 반주를 하러 오시는데, 오자마자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하나 꺼내세요. 분명 주문을 안 했는데, 안주랑 다 세팅이 돼서 나오죠. 할머니께서 순대를 썰면서 오늘 얼마 잡았냐고 물어보시면 퉁명스럽게 “오늘 뭉쳤다(망쳤다).”고 답하고요. 그런 대화에서 제주다움이 느껴지죠. 퍽퍽한 것 같은데 되게 따뜻한 것이 제주다운 모습이랄까요? 처음에 가면 되게 박하게 대하는데 나중에 가면 가족을 소개해줄 정도로 따뜻하죠.


처음 이사 왔을 때만 하더라도 앞집에 살고 계시는 할망께서 저를 반기지 않으셨어요. 외지인이니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저희 세무사님의 시댁인 거예요. 그때부터 할망이 볼 때마다 큰 귤을 넣어주시고, 어떤 날은 닭을 잡아 오셔서 주셨어요.(웃음) 참 오묘해요. 잠깐 마당에 가서 통화하는데 지금 내가 앞집 할머니의 며느리랑 통화하고 있다는 게 너무 재미있고 세상이 좁다는 걸 느끼죠. 제주살이, 지역살이는 그런 것 같아요. 연로하셔서 열심히 설명해드려도 이해를 잘하지 못하시지만, 지나가면서 항상 “뭐함꽈?”라고 물어봐 주는 동네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게 참 좋아요.


제주의 돌 이야기를 담고있는 머들 북 中 Ⓒ오두제


제주에 살다 보니 일과가 동절기, 하절기에 따라 달라져요. 제주도 사람들은 여름만 보고 살거든요. 서울에서는 더우면 짜증 나고, 집 가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싶은 느낌이잖아요. 그런데 제주도의 볕은 좀 다른 것 같아요. 따뜻한 느낌이랄까요? 제주도에 와서 볕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땡볕에 1시간 반 동안 산책하기도 하죠. 그리고 차가운 물에서 놀다가 밖에 나오면 뽀송뽀송하게 마르는데, 그 느낌이 목욕탕에서 주는 개운함과는 다르게 정말 특별해요.


하절기에는 햇빛을 충분히 즐겨야 해서, 날씨가 좋으면 하던 일을 덮고 나가서 놀다가 저녁에 와서 다시 일하거나 다음 날 좀 일찍 출근하죠. 우리 이렇게 일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너무 많이 나가기도 했어요.(웃음) 첫 여름 때는 정말 많이 놀았는데, 두 번째 여름 때부터는 일이 많아지면서 너무나 좋았던 지난해를 추억하면서 강제로 갇혀있었죠. 그렇지만 여름에는 어떻게든 나가서 놀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어요. 제주도에 오고 나니 일과 쉼의 경계가 아예 사라졌어요.


오두제의 목표는 딱 하나거든요. ‘가장 제주다운’이라는 타이틀을 갖자는 거죠. 제가 온 힘을 다해 제주를 느끼는 순간이 어찌 보면 가장 일에 심취한 순간일 수 있죠. 너무 변명 같나요?(웃음) 그런데 정말이에요. 이제 오두제는 기념품이라는 타이틀을 지우고 제주도 라이프스타일, 제주도 로컬디자인 브랜드로 나아가려 하거든요. ‘역시 제주도의 라이프 스타일, 재밌어!’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두제 제품을 사용하셨으면 좋겠어요.


지솔님과 먹구, 꽃분이 Ⓒ탐방



오두제의 머들 시리즈를 처음 만났을 때, 돌이라는 딱딱한 무생물을 활용했음에도 참 포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받았어요. 뜨거운 햇살이 아닌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는 여유로운 제주 바다와 들판이 떠올랐달까요? 지솔님도 그랬습니다. 차분하고 담담하게 제주살이와 오두제 이야기를 하는 지솔님을 보는 것만으로 충만한 행복이 전염되는 듯했어요. 그래서 더욱 오두제의 다음이 궁금합니다. 진짜 제주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만드는 제주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라니. 저희가 알지 못했던 제주가 얼마나 무궁무진할까요?


로컬에서의 삶, 지솔님과의 대화에서 궁금하거나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면 댓글과 리뷰로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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