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 2기

from 주야, 이토록 낭만적인 여름밤, 정동진 독립영화제

올 여름, 강릉은 유독 뜨거웠어요. 해가 지고 나서 가벼운 산책을 하려고 현관문을 열었다가도 숨이 턱 막히는 공기에 문을 다시 닫아버린 적도 있었죠.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실내에서 뒹굴뒹굴하는 게 최고의 여름휴가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지만 창밖의 푸릇하고 깨끗한 하늘을 바라보면 여름의 풋풋함을 제대로 누리고 싶어서 몸과 마음이 들썩이더라고요. 낮에는 바다에서, 계곡에서 물놀이하며 더위를 식히고 들뜬 마음도 달랠 수 있지만, 깜깜한 여름밤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 

정동진 독립영화제는 매년 8월 첫째 주 주말, 정동진해변의 10분 거리에 있는 정동초등학교에서 열리는 야외 독립영화제입니다. 영화제의 슬로건처럼 별이 지는 시간,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 하루에 열 편 정도의 독립영화를 금, 토, 일, 3일 동안 상영합니다. 올해 제 25회 정동진 독립영화제는 8월4일부터 8월 6일까지 진행되었습니다. 강릉시네마떼끄에서 주최하는 정동진 독립영화제는 강릉에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시작한 영화제라고 해요. 매년 계속되고 있을 뿐 아니라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유의미한 영화제로 자리매김한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강릉 시네마떼끄가 운영하는 강릉의 독립예술극장이 재정적인 문제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는데 영화와 지역에 대한 사랑과 의지가 얼마나 단단한지 감히 상상할 수 없네요. 

처음 가본 정동진 독립영화제는 영화제의 슬로건 그 자체였어요. 우리네 삶을 말하는 영화, 밤하늘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별, 스크린 너머 넓게 펼쳐지는 산, 그 사이를 지나가는 기차. 정말 이토록 낭만적일 수 있다니 감격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영화제에 첫날 참여 후 둘째 날, 마지막 날까지 3일 내내 출석 도장을 찍었습니다.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에 몸이 끈적해져도, 늦은 시간에 눈꺼풀이 무거워져도,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에 온몸이 젖어도 영화제가 열리는 3일 내내 정동진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 작지만 넓은 야외상영관, 정동초등학교

정동초등학교의 정문을 들어갈 때부터 사랑스러운 시골 초등학교의 풍경에 괜스레 흐뭇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작고 낮은 담과 알록달록 칠해진 벽화들이 예쁘고 귀여웠어요. 운동장에 걸린 스크린 너머에는 높은 산이 겹겹이 펼쳐져 있었고 그 사이로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학교 건물이 작아서 하늘은 더 넓어 보였습니다. 운동장에 놓인 저마다의 돗자리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저녁거리로 사 간 닭강정을 먹었는데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무언갈 먹는다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마치 소풍 같았어요. 해가 저물어 갈 때쯤, 영화 상영이 시작되었고 구름 사이로 별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어요. 영화를 보다가 하늘을 보다가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멍하니 바라보다 뾰로롱 지나가는 별똥별에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성이 넘치는 상영관이었어요. 

📣 세심하고 따뜻한 운영

영화제는 스태프분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만들어 주시는 비눗방울을 맞으며 시작됩니다. 투명하고 빛나는 비눗방울이 영화제의 공간으로 들어왔음을 인지하게 해주었어요. 낭만적인 입장이었달까요? 운동장에 피어오르는 쑥불은 여름밤 모기 걱정을 덜어주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시며 운동장 양옆에서 쑥불을 때주시더라고요. 그윽한 쑥 향도 좋았습니다. 마지막 날은 폭우가 쏟아져 야외 상영은 취소되고 대강당으로 상영관이 변경되었는데요, 긴급한 상황에서도 친절하고 또 신속하게 대처하시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무덥고 변덕스러운 여름 날씨에도 찌푸림 없이 영화제를 진행하시는 스태프분들을 보며 영화가, 영화제가 좋아서 함께하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제를 진행하는 동안, 청각장애인을 위해 실시간으로 한글 자막과 한국 수어 통역을 제공한 것도 따뜻하게 느껴졌고, 영화제가 끝난 후 쓰레기 정리 및 분리수거를 독려하시던 것도 마음이 편했습니다. 아, 무료로 운행하던 강릉 시내와 정동초등학교를 오가는 셔틀버스도 다정하다고 생각했어요. 

🎈 모두가 함께하는 영화관람

관객과 적극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야외 영화제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모두가 함께 영화를 보는 느낌이 참 정겨웠습니다. 영화의 흐름에 맞춰 다 같이 환호를 지르고, 아아 탄성을 내뱉다가, 박수를 쏟아냈어요.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영화관람은 처음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옆 사람의 말소리, 아이의 울음소리, 강아지가 끙끙거리는 소리 등의 일반적인 영화관람에 소음으로 느껴지는 소리도 전혀 방해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나긋나긋 들리던 풀벌레 소리처럼 자연스러웠어요. 관객석에서 같이 영화를 보던 배우분들, 감독분들과의 GV^*도 유독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배우와 감독분들도 관객들의 생생한 반응을 함께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고 하시더라고요. 정동진 독립영화제의 폐막식에는 관객과 영화인, 스태프 모두가 함께 모여 단체 사진을 찍는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다 같이 사진을 찍으니, 올해 영화제를 함께했다는 돈독한 마음을 들더라구요. 

GV(Guest Visit) : 영화 시작 전이나 후, 영화 관계자가 참석해 영화에 대해 관객과 대화하는 일

🎬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

독립영화^*는 너무 개인적이고, 어렵다고만 생각하고 있던 1인 이었는데요. 상영된 20여 편의 모든 영화가 다 기억에 남을 만큼 영화 자체가 너무 좋았습니다. 출품된 작품만 1,000점이 넘는다고 해요. 그렇게 추리고 추려진 작품들이어서 그런지 상영된 영화 한 편, 한 편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독립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신선한 연출과 생생한 연기, 그리고 날렵하게 우리의 삶을 담고 있는 내용까지. 꽤 긴 시간 이어지는 (한 섹션 당 1시간 ~ 1시간 30분 정도, 2섹션 혹은 3섹션 이어집니다.) 상영 시간에도 영화에 집중하게 되더라구요.  우리의 삶의 고민을 다양한 방식으로  담아내는 영화들을 보며 공감하기도 하고, 위로받기도 했습니다. 영화가 주는 여운에 영화제가 끝난 뒤 일상적인 순간들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독립영화 : 일반 상업영화와는 달리 창작자의 의도가 중시되는 영화로, '독립'이란 자본과 배급망에 크게 의존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 모든게 합쳐져서 여름밤의 낭만이 완성되었던 것 같아요. 정동진 독립영화제 덕분에 저는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로 기억에 남을, 끝내주는 여름밤을 보냈습니다. 앞으로의 여름은 정동진에서 보내겠다는 다짐을 하면서요. 더위에 지친 여름밤, 정동진에서 같이 영화보실래요?

정동진 독립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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