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 2기

from 땡칠, 주공아파트, 재건축

“모델하우스 좀 들렀다 가면 안 되나?”

오래간만에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가 갑자기 만나자마자 뜬금없이 하는 말이 저랬다. 알고 보니 본인이 퇴거하기 직전까지 머물던 주공아파트가 재개발되는데 그걸 구경하고 싶었던 눈치였다.

🏢 나의 추억, 주공아파트

불과 한 달 전쯤 철거가 된 주공아파트는 유년 시절 살던 동네의 대표 아파트였다. 초등학생이던 당시에도 주공아파트는 오래된 아파트였는데, 만약 아직 그대로 있었다면 거의 50년을 버틴 장수 아파트가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주공아파트는 유독 실내를 리모델링하는 경우도 적고, 실외도 최소한의 보수를 제외하면 딱히 큰 개선이 이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출처 : 전형철,"창원 35년 된 아파트 3.3㎡당 3000만 원 넘었다", 김해뉴스, 2021.05.04)

덕분에 어느 집에 가든 특유의 낡은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졌고, 5층을 채 넘기지 못한 아담한 건물 안 각 집에서는 청소의 문제를 떠나 지우려고 해 지울 수 없는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만큼 더 사람 냄새가 나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낡은 건물이나 쿰쿰한 냄새만이 주공아파트의 전부는 아니었다. 친구랑 집에 놀면서 먹으라고 무심하게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을 가득 채워 놓고 나간 지원이 어머니, 다이어트 중인데 동생 친구에게 맛있는 걸 사 줘야 한다면서 굳이 치킨을 시켜서 나눠 먹던 민수 누나, 중학생 때 영어 단어 시험을 앞두고 저녁이 되도록 단어를 못 외워 버럭 화를 내던 공부방 선생님 등 수많은 인연이 스쳐 지나가던 공간이기도 했다.

🏢이젠 더 이상 주공아파트가 아니다

하지만 그 시절 가볍게 드나들던 주공아파트처럼 아무나 구경이 가능할 줄 알았던 모델하우스는 예상외로 입장이 쉽지 않았다. 아파트 조합원이 아니면 입장조차 불가했고 같이 갔던 친구처럼 조합원의 자녀라 할지라도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시하는 것부터 서약서 작성 등의 여러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입장이 가능했다. 나 또한 겨우 ‘조합원 자녀의 지인’이라는 복잡한 임시 직위를 부여받고 나서야 동반 입장이 가능했다.

모델하우스 안은 삼엄했던 모델하우스 입구의 분위기와 확연히 달랐다. 그 깐깐한 모델하우스를 들어서는 순간 낯선 직원들의 깍듯한 인사를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창원시의 한 부분을 똑 떼서 축소한 듯한 지도 위에 주변 공간과 상당한 이질감이 드는 높은 고층 아파트가 우뚝 솟아있는 모형을 볼 수 있었다.

“이게 주공아파트라고?”

“야, 이제는 주공이라 하면 큰일 난다. 창원센트럴아이파크.”

어안이 벙벙한 내 표정을 보며 친구는 농담 섞인 어조로 답을 했다. 친구는 사실 옛 추억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조합원으로서 몇 층의 집을 배정 받느냐에 더 집중하는 눈치였다. 그만큼 당사자로서 살 만큼 살았으니 좋은 집에 살고 싶은 생각이 우선일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곧이어 입주 매니저라는 분의 안내를 받아 모델하우스 안의 실내 견본 공간으로 들어섰다. 물론 연출된 공간이라는 팻말이 곳곳에 있었지만 그걸 제외하더라도 주공아파트의 그 낮고 정감 가는 분위기와 달리 높은 지상고, 전용 드레스룸,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제어하는 시스템까지 갖춰진 현대 문명의 집합체 같은 실내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 어쨌든 창원의 재건축은 계속된다

그렇게 모델하우스를 다 둘러보고 다음 행선지로 가는 차 안에서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는 터를 가만히 내다봤다. 곧 철거할 운명이라 그런지 촘촘히 가벽을 둘러쳐 놓긴 했지만, 그 사이로 앙상하게 콘크리트 구조물만 남은 아파트의 모습이 언뜻 볼 수 있었다. 인부들의 사인과 같은 빨간색 페인트로 크게 X자 표식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그 모습을 차량 조수석에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살아본 적도 없는 곳을 그리워하는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정작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고대하던 자리에서 난 왜 씁쓸한 마음이 들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감출 겨를이 없다.

얼마 전 정부의 안전진단 기준 완화 조치 이후 창원시 내 6개 구역이 한꺼번에 안전진단을 최종 통과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다른 아파트 역시 곧 주공아파트의 뒤를 이어 새로운 모습을 할 것이다.

#유년시절 #아파트 #재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