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 3기

from 벨벨, '인제'와 생각해보니

✉깊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폭우가 쏟아져 마을 진입로에 산사태가 나있었어요.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 차를 돌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가다보니 속이 메슥거렸어요. 이것이 인제의 첫인상이었네요.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을까요? 산골에서 군생활을 한 군인들과 가족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인제'와 '원통'은 다름아닌 지명이랍니다. 파주, 연천, 철원, 양구, 인제 등은 우리나라 방어의 최전선이에요. 서울에서 홍천을 지나 인제로 넘어가다보면 휴전선 이전의 38선의 흔적도 만날 수 있어요. 때문에 군부대도 많고, 많은 군인들과 군인가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기도 해요. 군 가족인 저는 2019년 끝자락, 그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강원도 인제에 툭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2024년 기준 인제는 인구밀도 19.30명/km2 으로 기초자치단체 중 인구밀도 최하위를 기록했어요. 전국 최대 인구 밀집 지역인 서울시 양천구가 25,044.69명/km2 이라하니 체감이 되실까요? 가장 번화한 읍내를 돌아다녀도 장날이 아니면 사람 만나기가 어려워요. 유동인구도 많지 않고 가로등도 흔치 않아요. 그래서인지 해가 일찍 떨어지는 겨울에는 오후 5시~6시만 되어도 문을 닫는 식당들이 있답니다. 적막과 고독이 내려앉은 깊은 두메 산골이지만, 덕분에 쏟아질 것 같이 찬란한 별들을 마주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 여하간 '사람'이 '먹고','사는' 곳

산 중의 시골 마을은 도시와는 다르게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선택지가 그리 다양하지 않아요. 식당도, 일거리도, 놀거리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그 몇 안되는 선택지가 오히려 인제의 매력이 되었던 것 같아요.

1) '먹고'  
코로나로 유통이 어려워지자 온 마을에 감자가 흘러넘쳤어요. 농민들의 저온장고에 저장되어 있던 감자를 온 마을 주민들이 나서서 사 먹고, 팔아주었어요. 매 끼니 식탁에 감자를 올렸어요. 감자 때문에 강원도에 살고 있는 것이 실감이 날 정도였어요.
예부터 강원도는 감자뿐만 아니라 메밀도 많이 재배되는 지역이라 어디를 가나 막국수를 흔히 볼 수 있어요. 달콤 새콤 막국수에 바삭한 감자전은 최고의 조합이지요. 집마다 막국수도, 감자전도 맛이 다 다르니 '막국수에 감자전을 먹어봤다!' 하려면 인제에서만 해도 다섯 군데 이상은 맛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황태도 빼놓을 수 없지요. 미시령과 진부령이 나눠지는 설악산 아랫자락 용대리에는 황태덕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요.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명태를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게 잘 말려준다네요. 그래서 용대리에는 황태구이, 황태 정식 등을 파는 맛집들이 많답니다.
누군가 인제로 여행을 간다면 막국수와 황태정식은 물론, 춘천보다 푸짐하고 맛 좋은 닭갈비, 숟가락 들어갈 틈 없이 홍합 가득 올려진 짬뽕밥, 들기름 향 솔솔 나는 폭신한 두부 그것도 아니면 윤기 좌르르 흐르는 질경이밥을 전부 다 먹고 와야 한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어요. 아마도 한 달이 모자랄 거예요!

<사진> 막국수와 감자전 _ 출처 : 네이버 업체 제공 사진

2)'살고'

가만히 있어도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앞에도 옆에도 뒤에도 온통 산뿐인 동네. 멀리서 보면 산이고, 가까이서 보면 나무겠죠? 알고 보니 인제는 목공예로 유명한 고장이었답니다.
강원의 나무들은 질이 좋아 조선시대에는 궁궐을 짓기 위해 황장목*을 벌목하여 인제 합강에서부터 한강까지 뗏목을 이용해 운목하였다 해요. 지금도 인제읍 터미널 바로 앞에는 목공예 전시장이 운영되고 있고, 지역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목공예 공방들이 자리하고 있답니다. 세련되지는 않지만 투박하고 정겨운 전통 공예가 인제 목공예만의 매력이지요. 그래서 인제에 머무는 동안은 나무를 엮고, 깎는 법을 배웠어요. 조용한 마을에 고요히 앉아 나무를 깎는 손놀림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평화로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요즘 몇몇 캠핑장에서는 캠핑을 하면서 원데이클래스로 우드 카빙을 배울 수 있다 하니 이 기분 좋은 평화를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연륜(年輪)이 오래된 소나무로 목질(木質)이 양호하여 관곽(棺槨)을 만드는 데 적합한 목재. 임금의 관인 재궁(梓宮)을 만들기 위해 특별히 관리했음.

 인제라고 모든 것이 다 조용한 것은 아니에요! 여름에는 내린천의 활기찬 물줄기를 따라 레프팅을 하고, 겨울에는 꽁꽁 언 강 위에서 얼음 썰매를 타고 빙어낚시를 한답니다. 눈 내린 숲속에 하얀 자작나무는 놓치기에 아쉬운 절경이지만, 사실 자작나무 숲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웠어요.

<사진> 한 여름의 원대리 자작나무 숲_ 소나무 숲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새하얀 자작나무 숲이 펼쳐진다.

'인제'와 생각해보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인제에 머물렀던 2년 반의 시간 동안 고요한 시골 마을에 흠뻑 스며들었었나 봐요.
얼마 전 생일날에는 왕복 네 시간 거리를 달려 인제 당일치기 여행을 하고 돌아왔어요. 어느날엔가 한참동안 나무를 깎다가 먹었던 막국수와 감자전이 그리웠거든요.

 아무것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던 곳에서 만났던 뜻밖의 즐거움들.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작은 즐거움을 찾아 다시 발걸음을 하게 되는 곳. 인제는 저에게 그런 고장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