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 2기

from 엉겅퀴, 낙원은 없다. 언덕은 있다.

내가 마포구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리고 민혜 님이 이제 막 언덕(UNDUCK)의 문을 열었을 때 우린 만났다. 이곳에 정 붙이지 못하는 밤에는 언덕을 들러 샌드위치와 수프를 먹었다. 그러면 다시 자고 일어나 대로를 지나쳐 출근할 용기가 생겼다. 이 장소에 다녀오면 마치 책을 읽은 것 같았다. 언덕에서의 뭉근하고 느슨한 기억들이 다행히도 내 마포구 삶에 개입하고 있었고, 나는 조금씩 안심할 수 있었다.

    연남동 서쪽에 위치한 작은 가게 언덕은 오후 5시부터 자정까지 열려있다. 큰 유리 대문을 넘고 작은 마당을 지나 들어가는 나무 공간. 이곳으로 오기 전 언덕은 장소를 옮겨 다니며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벽에 붙어있는 언덕에 대한 문장과 그림은 언뜻 언덕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듯하지만 다시 읽어보면 질문이다. 오는 이들은 내어주는 음식을 먹으며 언덕이란 단어의 수수께끼를 풀어 본다. 언덕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곳에서 언덕을 지키는 민혜 님의 삶은 이 동네와 어떻게 어우러지고 있을까. 탐방으로 시작한 <마포구 사랑하기> 여정의 끝에서 민혜 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일상을 열고 가게를 여는 장소, 마포구

민혜    저는 모든 생활이 다 마포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가게와 가까운 곳에 살고 있고, 매일 아침 망원시장에 가고, 그냥 제가 가는 곳을 다니며 이 안에서 계속 살고 있어요.

엉겅퀴   그러면 살기 전후에 마포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게 있나요? 원래 민혜 님께 어떤 동네였나요. 여기는?

민혜    여기 산 지는 이제 3년 정도 돼 가는데, 사실 그전에도 이 지역에서 오래 일을 해서 마포구에 머문 지는 거의 한 5~6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이사하고서도 딱히 달라진 게 없었던 게 살기 전에도 맨날 시장 가는 거 좋아하고, 좋아하는 카페 가고, 패턴이 늘 똑같았어요. 그러면서 자전거 타기도 좋고 내가 여기 있는 게 나도 되게 편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여기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살게 된 거라, 여기서 살면 엄청 좋겠다거나 환상이 있어서 온 게 아니고 이미 적응한 상태에서 집만 옮기다 보니까 그냥 마포구에서 잠만 더 자는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엉겅퀴   그러면 지금 언덕이 여기서 처음으로 장기적으로 열리게 된 거잖아요. 그 이전에는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그때그때 열었었고요. 민혜 님이 이 가게를 고를 때 이 동네에서 무엇을 보아서 이곳을 선택하게 되었어요?

민혜 사실은 그런 건 제 주관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일단은 로컬스티치^*에서 제안해 준 몇몇 공간 중에 ‘로컬스티치 연남’을 들었는데, 공간이 되게 작았고 집이랑도 가까워서 여기가 좋다고 결정 내렸던 것 같아요. 그전에는 이 골목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가게를 열면서 홍대 같은 번화가 골목이 아니어서 잠잠하고 조용하고, 동네 사람들도 많이 다녀서 좋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내가 이곳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냥 계속 알아갔던 것 같아요. 여기선 이게 맞는구나 이런 식으로.

*언덕은 로컬스티치라는 공유공간 브랜드와 함께하고 있고, 로컬스티치 연남의 1층에 있다.

언덕을 오르자

엉겅퀴     밤에 열리는 샌드위치 가게로 소개되는 언덕은 특별한 장소인 것 같아요. 장소라는 것은 고정된 이 공간인데 ‘언덕’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꾸준히 드러내고 있어요. SNS 글에서도 공간에서도요. 언덕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늘 궁금한 존재이고, 움직이고, 쌓이다가도 허물어지고, 또 언덕에서 내어주는 음식도 그렇죠.

민혜    샌드위치를 시작하게 된 게 제가 샌드위치라는 음식을 진짜 좋아했어요. 21살 때인가 22살 때인가 이제 써브웨이가 막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침 7시부터 일을 하고 나면 오후 1시에 끝나서 늘 샌드위치를 하나 싸가지고 한강 공원 쪽으로 걸어가서 거기서 먹고 집에 갔어요. 그때 제가 이제 막 휴학하고 힘들 때였는데 그 행위 자체로 되게 위로가 많이 되는 거예요. 간단하게 가져갈 수 있는 음식과, 내가 가만히 앉아서 쉴 수 있는 곳, 그리고 자연이 주는 공기들 이런 게 저한테 위로가 많이 되었고 그 경험이 되게 좋았어요. 그때부터 샌드위치라는 음식에 대한 기억을 쌓았던 것 같아요.

언덕은 이런 경험들이 중첩되어 만들어졌다.
샌드위치에서 출발한 것도 아니고, 가게를 해야지 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삶을 둘러싼 민혜 님의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지금의 언덕이라는 형태로 나왔다.

민혜    언덕은 어떤 의미예요라고 이렇게 말을 못 하겠는 게 주제는 하나지만 그 형태가 계속 달라지는 것 같아요. 스스로 의미를 그 단어 속에 계속 넣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어떤 시기를 보내고 어떤 마음을 키우느냐에 따라서 언덕이라는 덩어리는 계속 달라져요.  

언덕에 걸터 앉아 샌드위치를...!

민혜    저한테는 한강도 언덕이었어요. 저한텐 ‘언덕’이 되게 안식처랑 비슷한 느낌이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고 그렇거든요. (가게를 여는 데에는) 이런 마음도 있는 것 같아요. 어디에든 분명히 외롭고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존재하니까 계속 그냥 그들에게 닿고 싶다. 사람들이 여기 와서 되게 위로도 많이 얻고, 그래서 운영이 조심스럽기도 하고 그렇지만... 제가 언덕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건 마냥 긍정적인 힘을 얘기하기보다는, 제가 손을 내밀었을 때 잡아줬던 사람들이 생각나서이기도 해요. 나도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런 역할을 해주고 싶다는 게 은연중에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언덕에 대해서 이게 명확하게 무엇이다 얘기를 하지 않는 것도, 각자 받아들이는 위로가 다르기 때문에 이곳이 그 사람이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언덕의 형태로 남아서 그게 조금 위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엉겅퀴    저는 언덕에  처음 왔을 때, 언덕은 추상적이고 하나로 딱 명확하게 말하지 않고 여지를 남겨두는 단어이구나 그렇게 느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 단어를 통과해서 다양한 걸 느끼게 한다는 게... 사실 구현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근데 언덕은 진짜 성공적으로 그걸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떤 걸 내놓고서 ‘이게 뭐예요?’하고 누가 물었을 때 ‘저도 잘 몰라요’라고 얘기하거나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거예요’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게 효과적으로 가닿아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기만의 생각을 할 수 있는가를 따졌을 때 이건 쉽지 않은 일인데, 여기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여기에 이입해서 자기만의 언덕을 생각하고 각자 다른 생각을 지니고 오고 간다는 점에서 정말 성공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과정은 가게를 시작해서 한 번에 팍 된 게 아니고 꾸준히 서서히 사람들이 찾아와 이뤄졌기 때문에, 결국 진심인 사람들이 하나둘 오게 된 것 같아요.

민혜    정말 저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모든 것에.

이 이야기가 가게로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맞나에 대한 고민은 있었지만, 조금의 확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샌드위치로 팝업을 했을 때 생각보다 공감해 주고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많네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 때문에 여기까지 연결이 됐던 것 같아요.

엉겅퀴    그전에도 조금씩 내 이야기를 들으려는 사람이 있겠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던 거군요.

민혜    제가 책 만든 거 아시잖아요. 근데 그거를 팔았을 때 진짜 안 팔렸거든요. 그러니까 약간 어렵다 난해하다는 얘기가 있어서 내가 작업을 하는 방식이 소통이 잘 되는 방식이 아닌가, 잘 들리는 방식이 아닌가, 근데 나는 이런 식으로 얘기를 계속하는데 그럼 어떡하지 하는 고민이 되게 많았거든요. 왜냐면 작업이 제 만족이기도 하지만 내가 얘기를 하는 데 들어줄 청자가 있어야지 작업을 계속하는 건데, (청자가 희미하니) 어느 순간 힘에 부치기도 하는 거예요.

근데 언덕을 주제로 샌드위치 팝업을 했을 때 성취감도 따라오고, 이거 괜찮다, 이거 나 좀 되게 재밌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게 제일 잘 통하는 언어라는 생각을 했어요. 같은 얘기를 다른 언어로 하니까 사람들이 다가오는 게 보여서, 우리는 이 행위로 많이 연결될 수 있구나를 느꼈어요. 그리고 이 연결이 제가 지속할 수 있는 힘이에요.

엉겅퀴    확실히 글로 전달하려는 시도보다 이렇게 가게로 표현되었을 때 이야기가 가닿기에 더 좋은 것 같긴 해요. 특히 언덕은 그 내용이 퇴색되지도 않고 아까 말했듯이 성공적으로.

민혜    매체를 찾아가는 것 같기도 해요. 나랑 잘 맞는 매체를. 삶 속에서 계속 내가 어떻게 하면 나의 언어를 잘 구현할 수 있는지를 계속 찾아가는 것 같아요. 근데 사실 제가 늘 하는 얘기는 똑같거든요.

옛날에 최고은 님 공연을 보러 갔는데, 그분도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자기 삶에서 계속 반복돼서 얘기하는 말이 있대요. 저는 그때 너무 공감됐거든요. 계속 하나의 주제를 얘기하는데, 그게 반복이 되니까 어느 때에는 다른 형태로 드러날 뿐, 결국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나는 언젠가까지 언덕에 관해 얘기를 하다 죽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냥 내 스스로의 숙제 같은 거죠. 내 만족이고 내 숙제고, 그럼에도 동의하는 사람이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고, 그런 마음으로 이 긴 여정을 끌고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이게 언제 언덕이란 단어로 구체화 되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블로그 글 쓰는 걸 좋아해서, 블로그에 검색해 보면 내가 옛날부터 썼구나 이 정도는 아는데 이걸 내가 언제부터 생각해서, 어느 순간에 언덕이라는 단어를 붙였는지는 물음표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것도 재밌어요. 계속 어쨌든 달라지는 형태로 나왔구나는 아는 것 같아요.

엉겅퀴    이런 면이 예술을 하는 작업자의 태도구나 싶어요. 내가 이 단어를 잠깐 쓰고 말 게 아니고, 이거를 내 삶 전체에 투영시키겠다고 하는 것이 신기해요. 그리고 언덕은 산처럼 높지가 않잖아요. 그래서 이 여정이 꼭 높은 곳을 향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결과를 향해서, 그 중심을 향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 도달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언덕을 안식처라고 생각해 보면, 내 안식처가 사실 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가족이 내 안식처라 하더라도 늘 가족이 좋은 것도 아니고. 이게 허물어졌다가 다시 쌓아 올리는 것도 너무 공감돼서 좋았어요. 저는 언덕이라는 단어가 이렇게까지 가능성이 많은 단어인지 몰랐어요. 그리고 특히 이 샌드위치라는 형태를 만나서 좀 더 다른 이야기들이 열리는 것 같기도 하고.

민혜    쌓여진 언덕 같기도 하고.

11월 2주 간 민혜 님이 내어준 언덕. 토란, 연근, 퀴노아, 견과류, 양파가 들어간 패티가 있다. 

엉겅퀴    샌드위치 얘기를 하자면, 저는 언덕의 언덕을 먹는 과정에서, 민혜 님이 잘 쌓고 덮어준 덩어리를 무너뜨리게 되고, 다시 그걸 잘 모아서 베어 물고, 손에 묻히며 흘리기도 하고, 뒤늦게 재료가 적힌 메뉴판도 뚫어지게 보다가, 우물거리며 생각하고 소화시켜요. 이런 ‘샌드위치’가 언덕의 정체성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기도 해요. 언덕을 먹는 행위도 정해진 목적지가 없는 과정의 연속 같다는 느낌을 받는데요. 여기에 민혜 님의 의도가 있을 것 같기도 해요.

민혜    신기한 게, 처음엔 사실 샌드위치라는 덩어리를 만들었을 때 이동하기 편한 음식이라는 포인트에서 만든 거였는데, 제가 손이 좀 크다 보니까 뭔가를 많이 넣어서 되게 커진 거예요. 그래서 생각보다 먹기도 너무 힘들어지고 걱정도 많이 했어요.

근데 제가 자꾸 허물어지면서도 다시 뭉쳐진다는 얘기를 글에서도 많이 쓰는데, 그 이유가 무너져야 다시 뭉쳐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너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상태로 갔을 때 나의 잔해들이 다 이렇게 주변에 떨어져 있잖아요. 그걸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힘이 되기도 해서, 허물어져야지만 뭉쳐질 수 있고 그래야지 또다시 오를 수 있고 이런 의미로 말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실 먹는 행위까지는 제가 엄청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걸 엉겅퀴 님이 이렇게 해석한 게 저는 너무 재밌었어요. 어떤 사람은 되게 불편하게 먹거든요. 먹기 불편해하는 분들의 말이 들리기도 하고요. 그런데 불편하면서도, 이런 것 때문에 이렇게 단어를 붙였구나라고 말해주는 게 저는 진짜 재밌기도 하고, 그걸 보면서 언덕은 이런 형태로 드러나는구나, 언덕을 이렇게 느끼시는구나 생각했어요.

민혜    언덕을 전시장처럼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어요. 와서 그냥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밥만 먹고 갈 수도 있고, 보고 언덕을 궁금해할 수도 있고, 나랑 얘기를 할 수도 있고, 뭔가를 털어놓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전시장 가서도 정해진 게 없잖아요. 그냥 대충 핸드폰만 보다가 나올 수도 있고, 그런 모든 게 괜찮은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엉겅퀴    그것도 성공적인 것 같아요. (웃음) 화이트 큐브 전시장이 아니라 가게의 모습인데, 이곳이 전시장이라고 했을 때 너무 충분히 납득이 가잖아요. 여기서 오히려 더 풍부하고 자유롭게 제가 느끼는 것 같기도 해요.

언덕으로 들어가는 길

스스로 비빌 언덕

엉겅퀴    이야기를 듣다 보니 민혜 님은 이 동네에서 쭉 가게를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을 것 같아요.

민혜    그것도 맞는 것 같아요. 오히려 장소에 대한 갈망은 많이 없는 것 같아요. 어딘가에 꼭 열어야지가 아니라 어디 열더라도 그 이야기를 하면 결국에 거기 동의하는 사람들이 온다는 확신을 저는 받아서, 장소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최대한 잘해보자 잘 전달해 보자는 마음이 큰 것 같아요.

엉겅퀴    그럼 가게에 한해서는 그렇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장소에 대한 갈망은 있을까요? 지금은 마포구에 살고 있지만 나중에는 이런 곳에 살고 싶다는 갈망이 있나요?

민혜    저는 진짜 그게 없는 게, 또 거기서 저의 언덕을 찾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저는 어딜 가도 (기댈)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구석. 그래서 어디를 가도 그 나름의 느낌이 있을 것 같고, 내가 살면서 그런 구석을 찾는 게 되게 소중할 것 같아요. 거기서 내가 또 다른 마음의 안식처를 찾지 않을까. (그래서 장소에 대해 제한적인 마음보다는) 앞으로 내가 어디에 또 머물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요.

이 용기는 나무와 영화 <카모메 식당>으로 설명할 수 있다.

민혜     제가 옛날부터 나무를 관찰하는 걸 진짜 좋아했어요. 나무는 우리 일상에서 진짜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형태마다 껍질이 진짜 다 다르게 생겼잖아요. 그러니까 같은 나무더라도 환경이나 살아온 시간에 따라서 다 다른데, 살아온 흔적이 껍질에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늘 적응하잖아요. 그런 게 저는 되게 멋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친구들한테는 어디로 갈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삶을) 계속 유지하고 또 거기에 자신을 맞추고, 아무리 기울어져도 또 기울어진 상태로 맞춰 살아가고... 이런 게 ‘나’랑 같이 살아가고, 나를 끌고 가는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나무뿌리와 가지가 손 같이 느껴지는데 나무가 그거로 엄청 멀리까지 뻗어 나가는 것 같아요.

제가 전에는 늘 어떤 장소에 대한 갈망이 진짜 많았어요. 내가 어딘가에 가면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아니면 나는 지금 여기이기 때문에 이런 거야, 지금 어딘가로 떠나야돼라는 갈망이 진짜 컸는데,  “그런 장소는 그러니까 그런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걸 한 번 인지한 이유로 어딘가에 가지 않더라도 내가 (일상을 위한) 장소를 만들면 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민혜     제가 영화 <카모메 식당>을 진짜 좋아하는데, 독립 영화 비평지 『캐스트 CAST』라고 거기서 언젠가 이 영화에 대한 글^*이 실렸어요. <카모메 식당>에서는 핀란드가 되게 낙원처럼 나오잖아요. 근데 사실은 ‘낙원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가 주제인데, 저는 그게 너무 재밌는 거예요. 사치에(주인공)라는 사람은 핀란드였기 때문에 오래 잘 살았던 게 아니라, 그 사람은 어디 가서도 잘 살 사람이었다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버티고 산 거래요.

그 말이 맞는 게, 그곳은 햇빛양이 적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릴 확률도 더 높다고 해요. 사람이 살기에 더 좋지 않은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잘 살았던 이유는 자기 삶을 유지하고 일상을 찾고 수영을 하고 나름의 방식을 찾았기 때문이에요. 저는 사치에도 어떤 언덕이나 안식처를 찾은 거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그냥 그렇게 좋은 데’가 있을까 싶어요. 제가 지금 호주에 가고 싶다고 하더라도 거기라고 과연 좋을까, 그저 나랑 잘 맞고 내가 조금 더 좋은 면을 볼 수 있는 장소가 또 있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제가 시장을 가고 일상의 소중함을 계속 복기하려는 것 같아요. 어쨌든 가게를 열면서 즐거운 순간이 뭐냐면, 아침에 시장 가고 빵집 사장님이랑 인사하고 이런저런 얘기하는 게 저는 즐겁거든요. 가게를 열어서 손님이 오고 이런 것도 좋지만 그것도 일상의 한 부분으로 느껴져요. 그냥 지금의 일상이 되게 행복해요. 이런 모든 일상들이 덩어리로 뭉쳐져서 저를 살게 해요. 오늘을 잘 보냈네, 내일 또 잘 보내야지 그런 마음이 유지가 되어요.

그래서 가게를 다 접는다 해도 미련이 없는 게, 나는 지금 오늘 하루를 잘 보냈고 또 잘 보내고 있기 때문에 이걸 당장 접어도 그렇게까지 미련이 없는 것 같아요. 또 다음에 다시 잘 열어서 다시 하면 되지, 지금은 나의 최선을 다했어, 다음 스텝을 또 가면 되지 이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제 삶의 단계들을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카모메 식당>에 관한 비평은 『캐스트 CAST』 1권에 수록되어 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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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 언덕은 또 쌓였다.

   어릴 적 “너는 어디 가서든 잘 살 애다”라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당시엔 칭찬인지 아닌지 헷갈려 멋쩍고 말았지만, 지금은 너무 듣고 싶은 걸 보니 방심한 사이 ‘어디 가서든’도 ‘잘 살 아이’라는 것에도 자신이 없어졌나 보다. 그러나 마포구에 대한 내 마음을 탐방하면서 자신감이 어느 정도 생겼다. 이곳이 어려운 이유를 살피고, 좋은 순간을 되새기고, 다른 지역에서 용기도 얻는 동안 마포구 땅에 나의 언덕이 쌓인 걸까. 이제 내 삶을 펼칠 장소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언젠가 또 이 언덕이 허물어지더라도 나는 엉덩이 툭툭 털고 일어나 다른 언덕을 찾아가겠지. 그곳에서도 잘 살아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