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 2기

from 주야, 강릉에서 다채로운 퍼즐을 맞춰나가고 있어요.

삶에 있어서 일하는 시간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제일 길지 않을까요? 로컬에서도 일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고 있어요. 오히려 더 많을지도요. 각자의 직무, 경력, 일하는 환경, 방식 등에 따라 가지고 있는 고민은 다르겠지만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은 같을 거에요.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꽤 힘들지만 그 과정을 통해 자기만의 일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을 찾아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김없이 일에 대한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문득 자신의 일을 기반으로 삶을 주도적으로 그려나가고 있는 한 사람이 생각났어요. 그는 서울에서 강릉으로 내려온 지 5년 차인 디자이너 백나영 님 입니다. 강릉의 로컬 스타트업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독립해서 프리랜서로 로컬의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하여 브랜딩과 디자인을 하고 있어요. 동시에 자발적으로 관계와 문화를 만드는 청년모임 '솔방울들'*을 운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로컬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고 또 확장해가고 있는 그와 일과 삶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봤어요.

(강릉의 청년모임 '솔방울들'은 나이를 공개하지 않고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며 반말로 소통해요.
물론 서로 가까이 지내다 보면 나이를 알게 되지만 서로 모른척합니다.(웃음) 인터뷰 역시 반말로 진행해 보았어요.)

" 삶은 다채로워야 하지 않을까? "

주야  어떻게 강릉에서 일하게 됐어?

나영  대학에 다닐 때부터, 막연하게 서울에는 내가 발붙일 곳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현실적으로 내가 여기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가 지낼 공간을 절대 마련할 수 없겠다 싶었어. 그래서 서울이 아니라면 이라는 생각을 계속 해왔던 것 같아. 내 성향이 경쟁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해. 공부를 할 때도 남들과 등수 경쟁을 하기보다 나와의 경쟁을 했던 것 같거든. '왜 다 똑같이 살아야 해?'하는 약간의 반골 기질도 있고.(웃음) 이래저래 서울과 속도가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고, 나와 속도가 맞는 지역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 서울이 아니라면 원래 마음속 1순위인 지역은 부산이었어. 부모님의 고향이 부산이어서 부산을 자주 갔었거든. 그러다가 기회가 강릉에서 먼저 왔어. 마음이 맞는 친한 친구를 통해 강릉의 한 로컬 스타트업을 알게 됐어. 그 회사의 비전이 흥미롭고 지역에서 새롭게 무언가 만들어나가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그렇게 강릉에 오게 됐지.

주야  서울에는 디자이너로 일할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회사들이 정말 많잖아. 옆에서 보면 일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거든. 강릉에 있는 회사를 선택할 때 고민이 많지 않았어?

나영  나는 자기 객관화가 정말 잘 되는 편이야. 학교를 다닐 때, 디자인과 특성상 하나를 파고드는 친구들이 많았어. 서울은 그런 디자이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자기의 스타일을 확고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나는 하나를 깊게 잘하는 것 보다 골고루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 한 가지에 집착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관심이 뻗어나가는 편이기도 하고. 이것도 손대고 싶고, 저것도 손대고 싶어 해. 오지랖이 넓달까. 디자이너로서도 디자인 영역 이상까지 고민하거든. 그런 성향이 바탕이 돼서 강릉에 있는 회사를 선택하게 된 것 같아. 서울의 회사들보다는 다양한 각도에서 일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아, 그리고 현실적으로 명예욕과 금전욕이 없기도 해. 이것도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아.(웃음)

주야 그렇게 강릉에서 와서 일하며 살아보니 어때?

나영  엄청 만족스러워. 그래서 계속 강릉에서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어. 나는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삶이 다채로워야 한다고 생각해. 사실 서울에서는 각자의 삶이 어느 정도 비슷해 보였거든. 이때쯤에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하는 일련의 과정과 좋은 회사, 좋은 삶에 대한 기준들 같은 거. 삶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살아지는데, 단편적으로 좋은 직업군이라는 걸 정해놓고 그 안에서의 삶만 있다고 말하니까 그게 좀 답답했던 것 같아.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싶었어. 세상은 그렇게 다 다른 삶들로 구성되어 있잖아.
강릉에서는 각자 다른 이야기를 가진 채로 다양한 일을 하며 지내고 있는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지내고 있어. 물론 서울에서도 다채로운 삶을 다들 살아가고 있지만, 오히려 더 많을 수도 있지만, 내가 그걸 볼 겨를이 없었어. 강릉에서 지내면서는 환경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생각을 비울 수 있는 시간이 좀 생기니까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있는 것 같아. 내 눈으로 다양한 삶이 있구나 확인하는 게 재밌고 즐거워.

주야  지금은 회사를 나와 독립했잖아. 프리랜서로 일하는 건 어때?
나영  힘들어.(웃음) 사실 요새 살짝 번아웃이 와서 고생 중이야. 일하는 과정에서 내 시간과 에너지를 내가 컨트롤해야 하는 게 어려워. 시간을 자율적으로 쓸 수 있지만, 그 자율성이 독이 되기도 하더라고. 고민하고 탐구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전에 진이 빠지기도 하고 마감의 압박에 더 시달리기도 하고.

주야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에 고민도 많았었잖아. 어떤 점이 고민이었어?
나영  회사를 다니는 게 잘 맞는 편이었어.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회사의 테두리 안에서 일하는 게 안정감을 줬거든. 4대보험, 근로소득세도 다 내주고, 급여도 고정적이고. (웃음) 또 성향이 어떤 일을 만들어가는 것보다 맡은 일을 해내는 걸 좋아하기도 하거든. 내 사업을 하고 싶은 욕심도 없었고.

주야  그러면 회사를 그만두면서 서울로 이직을 하는 건 고민하지 않았어?

나영  서울로 돌아가는 건 선택지에 없었어. 강릉에서의 삶을 이미 경험한 이상,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 강릉에서 해온 일들이 있고, 친구들이 있고, 여기서의 생활이 만족스럽고. 이미 삶의 기반이 많이 만들어진 느낌이랄까. 강릉에서 지내고 싶고, 잘 지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 강릉에는 회사가 많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커리어를 계속 이어가려면 독립할 수밖에 없었어. 물론 다행히 프리랜서로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이었지.

" 누군가와 함께 퍼즐 조각을 맞춰나가는 과정이 즐거워 "

주야  '솔방울들'이라는 커뮤니티는 어떻게 운영하게 됐어?

나영  회사를 다닐 때, '강릉 살자'라는 청년마을사업을 진행했었는데 그 사업에서 기획자의 역할도 맡게 됐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커뮤니티를 만들어나가는 일이 꽤나 적성에 잘 맞았어. 기획자로서의 영역을 확장하고 싶었던 시도라고 할 수도 있는 것 같아. 무엇을 하게 될진 모르지만 사람들이 모여있어야 무엇을 할 수 있다고도 생각해서 사람이 제일 큰 자원이라는 생각을 계속했었어. 물론 혼자였으면 절대 못 했을거야. 나는 일을 진행시켜나가는 건 할 수 있지만 사람을 모으는 일에는 재주가 없거든. 운영진으로 있는 다른 친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어. 지역에서 커뮤니티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커뮤니티의 성격에 대해서도 마음이 맞는,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함께해서 '솔방울들'을 만들어나갈 수 있던 것 같아.

주야  디자이너로서도, 커뮤니티 운영자로서도 일하는 모습을 보면 주도적으로 일을 만들어 나가는 것 같아. 일을 할 때 성취감이 크다든지 같은, 일을 대하는 마음이나 태도가 궁금해. 어떻게 일하고 있어?

나영  나는 일을 할 때 성취감이 중요하진 않은 것 같아. 나는 과정을 좋아하는 편이야. 퍼즐을 완성했을 때 그 완성된 그림이 얼마나 예쁜지 보다는 퍼즐 조각을 맞춰가는 재미가 훨씬 커. 이 모양이 맞을까, 저 모양이 맞을까 하는 과정이 즐겁달까. 디자이너로 일할 때도 디자인 너머의 것들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해. 기획에도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 디자인과 어울리는 이미지, 워딩, 마케팅 방식 등 브랜드의 전반적인 것들에 대해서 제안하기도 해. 디자인으로만 설득하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봤을 때 디자인이 이렇게 흘러가야 마케팅으로 활용하기도 편하지 않을까 하는 식이야. 그래서 일할 때 대화가 잘 되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서로 화려하다고 느끼는 정도, 심심하다고 느끼는 부분 등 각자의 뉘앙스가 다 다르니까 그걸 맞춰가려고 얘기를 정말 많이 나눠. 디자인에 있어서 필요하지 않은 부분들에 대해서도.
또 내가 어떤 스타일인지 아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 나는 챌린저가 필요한 조력자 스타일이야. 어떤 일이 던져졌을 때 그걸 열심히 수습하고 해결하는 스타일이어서 옆에 일을 벌여주는 사람들이랑 함께하면서 일을 만들어가는 것 같아. '솔방울들'도 그렇게 만들어질 수 있었고.

" 내가 선택한 것에 충실하려고 해 "

주야  강릉에서 일하고 지내면서 불안함을 느낀 적도 있어? 나는 문득 서울에서 지냈던 내 삶과, 또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친구들과의 삶과 비교하면서 지금 괜찮나, 잘 살고 있나 고민하기도 하거든. 나영  있긴 있지만 그런 불안감이 약한 편인 것 같아. 내가 책임져야 하는 여러 가지에 고민스러운 부분은 있긴 하지만 그냥 막연한 믿음이 있는 것 같아. 내가 강릉에서의 삶을 선택한 이상, 어떤 일을 해서든, 어떻게든 살아내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 낙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아. (웃음) 타인의 삶은 타인의 삶이고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니까. 그들이 가진 걸 내가 당연히 가질 수 없고. 내가 선택한 삶의 영역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를 생각하는 것 같아. 안되는 걸 붙잡고 있기 보다 안되는 건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되는 걸 선택해서 하다 보면 되는 사람이 되는 거니까. 내가 선택한 것들 안에서 되는 방향으로 해나가는 거지 뭐.

이야기를 나누며  나영 님은 현실적인 낙관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고, 자기가 기준이 되어 자신만의 선택을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그림을 완성하는지 보다 퍼즐을 맞춰나가는 과정 자체에 집중하고 그 과정을 즐기면서요.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지내든지 나의 퍼즐 조각을 맞춰가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고민이나 걱정, 불안이 많다면 일단 지금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해 보는 건 어떨까요? 지금의 조각들을 요리조리 맞춰보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