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 3기

from 순,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일

여는 이야기

  독일의 작은 도시 마인츠에서 교환학생으로 잠시 머문 적 있다. 그때 문화교류 프로그램으로 할머니 자매 두 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종종 만나서 밥을 같이 먹고 산책을 했다. 어떤 작은 동네의 작은 산책길이었다. 둘은 갑자기 걷다 말고 멈춰서 길바닥에 떨어진 덜 영근 밤을 줍기 시작했다.

“먹을 수 있는 밤이야?”

“아니, 못 먹는 밤이야.” 

“그럼 왜 모으는 거야?”

“가을을 기다리려고.“ 

  우리는 한동안 쭈그려 앉아 귀엽고 윤기가 나는, 흠집이 없는 밤(나중에 알게 된 건데, 그것은 마로니에 열매였다)과 바싹 잘 마른 나뭇잎을 골랐다. 사람들이 교환학생을 하면서 무엇을 배웠냐고 물으면 나는 이 이야기를 한다. 계절의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시간의 흐름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을 만난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계절감을 즐기는 것이 여유로운 사람들의 사치처럼 느껴진 적 있다. 내 상황이 여유롭고 너그럽지 않으면 크리스마스도 바캉스도 남의 일일 뿐이다. 시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는 쇼핑몰이나 상업공간 정도였고, 그것도 다 대기업의 마케팅에 불과하지 않나. 하지만 먹지도 못할 그 작은 밤을 고르고 또 골랐던 날로부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사무실 한 켠에라도 계절의 징표를 둔다. 여름이 되면 무성해지는 야자잎을 지켜보고, 눈 내리는 날이면 희끄무레해지는 창문께를 사랑하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에는 빨간 컵이라도, 할로윈에는 밥그릇에 사탕이라도 담아 둔다. 그런 일들은 돈이 많이 들지 않지만 나를 기쁘게 한다. 

  춘천에 살며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쇼핑몰도 네이버 검색창도 아닌 일상에서 이런 계절감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가로수의 변화나 기상청 예보로만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아주 크고 분명하게 느껴진다. 춘천사람들에게는 당연하지만 나에게는 다른 세계처럼 낯설었던, 그 미묘한 일상 적응기를 꺼내 보고자 한다.   

봄이 참 늦게 오는 봄의 도시

  춘천 사람들은 봄을 참 좋아한다. 우리말로 춘천을 풀이하면 ‘봄내’인데, 이는 시청에서 발간하는 시정소식지 이름이기도 하다. 춘천의 시화가 봄을 알리는 개나리인 것도 그런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비유적으로 ‘봄의 도시’라고 부른다거나, 행사명을 지을 때 ‘~해 봄’과 같은 말장난도 많이 한다. 봄 춘 자가 들어간 전국에서 유일한 도시이기 때문도 있을 것이고, 많은 이들에게 춘천의 이미지나 분위기를 물어 봐도 새학기 새로운 사람들과 엠티를 떠났던 추억이라든지, 첫사랑과 설레는 마음으로 떠났던 첫번째 여행이라든지를 떠올리는 탓도 있을 것이다.

  벚꽃 개화 시기를 알려주는 지도가 있다는 것을 나는 춘천에 와서 알았다. ‘어련히 이쯤이면 벚꽃이 피겠지’ 생각했을 때까지도 기색이 없어 당황스러운 마음에 검색해 보았던 것이다. 춘천은 늘 꼴찌 라인업에 올라와 있다. 10일에서 15일 정도 늦게, 짧게 피어나고, 순식간에 여름을 맞을 채비를 마쳐 버린다. 꽃이 피었을 뿐인데 동료들이 부지런을 떤다. 피어 있을 때 잠깐이라도 나가서 봐야 한다. 점심시간에 꽃나무 밑에서 도시락이라도 먹어야 한단다. 그만큼 이 기회가 짧고 순식간에 지나가기 때문이다. 

  춘천 부귀리에는 2.5km 가량 벚나무가 심어진 벚꽃길이 있다.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작년엔 지역 주민들이 “부귀리 벚꽃축제”를 준비했다. 그런데 봄의 도시란 이름이 무색하게도 따뜻해질 만하면 떨어지는 온도에 냉해를 입은 벚꽃이 제대로 피어나지도 못하고 계절이 지나 버렸다. 같은 춘천이지만 부귀리까지는 춘천 시내에서도 40분은 족히 운전해 들어가야 하는데, 부귀리 주민들은 찾아온 손님들이 실망할까 봐 벚꽃길에 현수막을 걸었다. 설렘을 가득 안고 첫 축제를 준비한 주민들이 가장 실망스러웠겠지만, 소문 듣고 찾아오던 이들을 위해 안타까워하는,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올해는 꼭 벚꽃이 탐스럽게 피어났으면 좋겠다. 긴 운전 끝에 눈앞이 환해지며 펼쳐지는 벚꽃길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벚꽃이 부실해 죄송합니다”

_{(링크) "벚꽃이 부실해 죄송합니다"…'벚꽃명소' 춘천 부귀리 주민들 현수막 사과 (강원도민일보 23.3.10.일자)}

부귀리 벚꽃길에서 만난 밤벚꽃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춘천에 와서 꼭 봄의 강가, 호숫가를 마주해 보았으면 좋겠다. 거기 서 있으면 만물이 생동한다는 말의 뜻을 알 것 같다. 모든 것이 여리고 앳된 숨을 쉬며 깨어나고 있음이 느껴진다. 봄의 춘천은 그래서 새로이 마음먹기 좋고, 새로이 시작하기 좋다. 

  어쩌면 진짜 봄은 너무 늦고 짧게 오지만, 사람들이 춘천을 “봄의 도시”로 기억하는 이유는 이곳에 와서 느꼈던 첫사랑과의 추억, 시작하는 설렘, 나무가 틔우는 싹, 여린 풀잎, 매섭지 않은 강바람, 그런 공동의 기억 때문인 것 같다.

필름카메라로 찍은 봄철의 강가

서울에서 놓친 벚꽃, 춘천에 와서 보세요 - 뒷북 벚꽃 명소 추천지 

🌸 공지천 의암공원 인근 : 춘천 사람들이 봄을 만끽하는 곳. 낮에도 밤에도 사람이 많다. 

🌸 부귀리 벚꽃길 : 올해는 벚꽃축제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담아 

🌸 한림대 에리트아파트 인근 : 오래된 아파트를 품고 함께 자라온 고목들이 아늑하게 펼쳐지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