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 3기

from 룰루, 내 발길 닿는 대로, 첫 로컬 영동

🔅의도한 것과 우연한 것, 선택한다면?

"소개팅할래? 아는 사람 중에 ~가 괜찮대"

'소개팅'은 어쩐지 선뜻 내키지 않는다. 남자가 있는 곳으로 직접 달려 들어가야 할 때가 됐다며 친히 안내해 주는데도 그 이정표가 고맙지 않단 말이지. 흠 그래서 외친다. 이전보다 조금은 덜 당당해진 목소리지만.

"자만추가 최고여"

다만 그 단어의 볼륨은 최대로 줄여놓고 완전히 끄지는 않는다. 언젠가 내 손으로 볼륨을 키울 날이 올 수도 있을 테니까(웃음).

'영동 가 볼래요?'라고 누가 제안한 건 아니었다. 그저 일주일간 지역살이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선택 가능 지역 중 영동이 있었고, '영동에서는 이런 것들을 경험할 수 있어요'라는 소개에 주저없이 영동을 택했다. 소개팅이면서 자만추인 셈이다. 주선자는 나오지 않는다는 추가 정보도 입수했다. 그렇다면 그곳 분위기와 리듬에 맞게 나를 맡기면 되지 않을까? 소개와 자만추 중 어떤 게 먼저이든 솔깃한 만남이 시작될 점이 찍혔다. 뭔가 몽글몽글하다.

📍기록할 소개는 1개, 자만추는 2개다.

자유 시간 중 반나절 동안만 돌아본 영동은 무척 짧았지만 아주 생생하다. 마지막 날 기차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추천받은 곳과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모두 돌아다녔다. 소개받은 곳은 영동 와인터널이며 자만추에 해당하는 곳은 역 근처 골목길이다. 레인보우 영화관을 기점으로 주변을 산책하며 만난 초등학교와 카페 등이다.

1. "와인터널 가볼 만해요"_소개(팅)

와인터널은 관광 안내도에도 나와 있는, 잘 알려진 관광 장소다. 영동역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라 가볍게 보고 오기 좋다. (오르막길이고 대략 30분 정도라는 점 미리 알려드립니다) 매년 8월 포도 축제가 열릴 정도로 포도가 유명한 지역이다 보니, 포도를 숙성시킨 와인과 관련해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관람 총 소요시간은 약 20분 정도라고 알려주었으나 터널 안 안내된 글을 천천히 다 읽다 보니 2배 정도 더 걸렸다. 하하.

터널 중간중간마다 해당하는 주제를 쨍한 색깔로 표시해 두었다. 이 때문인지 도장 깨기를 하듯 통과하는 기분이 알록달록했달까. 와인의 역사를 공부할 수 있고, 효능과 만드는 방법 및 와인으로 유명한 나라가 어디인지도 알 수 있었다. 또 그 나라의 와인병과 저장고 안 오크통을 볼 수 있어 시각적으로 흥미로웠다. 마지막에는 와인 시음과 구매까지 할 수 있어 알딸딸한 향과 맛이 충분한 즐거움도 주었다. 술에 관심 있는 사람으로서 만족스러운 추천 장소였다. 호호.

"누군가의 소개로 일부러 찾아간 곳이지만, 너 좀 마음에 들었다. 꽤 호감이었어."

*와인저장고 이미지(마지막)를 누르면 관련 사이트로 이동

2. 지나쳤던 게 기억나서, '레인보우 영화관'_자만추

약 1시간 정도 와인터널에서 시간을 보내고, 기차 시간까지는 40분 남짓.

영동역에서 레인보우 영화관까지 걸어서 10분도 채 되지 않으니, 시간은 충분하다 싶었다. 부지런히 걸어서 역세권 골목들을 찬찬히 음미하다 보면 어느새 도착. 아! 중간에 잠깐 길을 잃어 장작 패는 한 어르신을 볼 수 있었다. 한옥 건물 앞에서 패는 장작이란 외지인으로서 노동, 힘듦이라는 개념보다는 약간의 낭만 그 어디쯤에서 기운이 맴돌았달까. 잠시 옆길로 샜다. 다시 돌아와 레인보우 영화관.

문을 열고 들어서니 팝콘 냄새로 한번, 양쪽으로 퍼지는 널찍한 내부로 또 한 번, 첫인상은 합격이다. 왼쪽에는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도 마련되어 있다. 오호 무엇보다 서울에서 보던 대형 영화관과는 엄연히 달랐다. 당연한 말이지만(웃음). 영동 시내 골목에 자리 잡은 이 영화관에는 번잡함과 복잡함이 없었다. 영화관에서 고즈넉함을 느낀 건 기분 탓이려나. 어쨌든 시민덕희, 외계+인, 웡카 등 최근 개봉한 영화들도 볼 수 있는 데다가 관람료는 6,000~9,000원 사이이니 매력적인 영화관이라 할 만하다.

"영동군민들을 위한 배려가 엿보이니까, 잠시나마 누려보려고"

*영화관 이미지(첫 번째)를 누르면 관련 사이트로 이동 *2024.01월 말 기준 상영 영화

3. 가까이에 '초등학교'가 있네_자만추

영화관에서 몇 걸음 걸어가면 영동 초등학교가 있다. 발걸음을 돌려 역으로 가던 중 우연히 발견한 곳.

아이들의 재잘거림 덕분에 고개를 돌렸다. "와 이렇게 앙증맞을 수가" 보자마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싱그러워지는 풍경을 마주했다는 기쁨이 차오를 때쯤 눈에 들어온 매점. 세상에 매점이라니. 손글씨체로 '추억의 제3교실 마트'라고 떡하니 적힌 간판이 날 사로잡았다. 어떤 이가 보기에는 그저 학교 옆에 위치한 슈퍼마켓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학교 쉬는 시간마다 매점으로 달려갔던 나에게는 학교=매점=향수 그 자체다. 하나로 연결된 세계라고나 할까.

잠시 추억에 잠겼다가 뒤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카페가 하나 보인다. 따뜻한 마을이라는 뜻의 '온리(溫里)'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고 엄마들끼리 수다 떨 수 있는, 기가 막힌 동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는 커피와 디저트로 당 충전하는 특별한 소소함. 지금 당장 누릴 수 없는 아쉬움에 코를 한 번 찡긋하고 돌아섰다. 마침 고맙게도 영동역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포도 벽화가 그려진 집이 마중 나와 있다. 하얀색 바탕에 수놓아진 보라색이 머금은 아기자기함. 작은 전시관이 되길 자처한 걸까? 이벤트 가득 품은 골목들이 정겨움을 가득 안겨 주었다.

"다음에는 안으로 들어가 봐야지(포도 벽화집 제외😆) - 더 진한 우연을 위해"

🎶그녀의 최종 결정

소개받았던 곳도 흡족했던 터라 고민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연스러운 만남이 좋다.

'발 닿는 대로' 이곳저곳 몸을 옮기는 과정은 고되다. 불확실하기 때문에. 길눈이 어두운 사람에게는 수시로 현재 위치를 확인해야 하는 불편함도 있다. 지도 앱이 없으면 큰일나는 거다. 예측이 잘되지 않아 계획은 뒤로 미뤄둘 수밖에 없고, 때론 기대했던 것과 다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요소들이 모여 뜻밖의 설렘과 재미, 장면을 주는 게 좋아서, 피곤함으로 마침표가 찍히지 않는다. 한 번만 맛보고 끝내기 어려운 이유다. 영화관에서 초등학교로 흐르는 여정이 그러했다. 와인터널에 비해 머문 시간은 짧았지만, 골목길 풍경을 흠뻑 느끼고 내 몸에 정취를 묻히고 가는 이 흐뭇함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렇다고 소개팅을 한사코 거절할 생각은 없다. 입소문으로 건너온 우연하지 않은 것들에서도 의외의 즐거움이 있을 테니까. 다만 자연스러움을 조금 더 추구한다는 것뿐. 볼륨을 조절해 가며, 때때로 화려하게 수더분하게.

뒤늦게 고백하자면, 영동역에서 영화관까지는 개인적인 의도가 살짝 숨어 있다. 차 속도가 아닌 사람 속도로 보기 위한 목적이었다. 차창 밖으로 봤던 화면으로만 남기기에는 아까워서 이 기억을 가지고 감정을 따라갔던 것이다. 영악함과 순수함이 섞인 이동이지만 어떠한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끌림이었고, 초등학교로 이어지는 우연을 만들었다. 마침내 짜릿함으로 다다랐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온 지 1개월이 넘은 이 시점까지도 에너지원이 되고 있으니 말 다 했다. 이 충만함을 영상화하고 싶을 정도니까. '한번 해보지 뭐'하며 기차표를 끊었던 게 참 잘했다 싶으니, 이 계획 아닌 계획은 언제가 됐든 계속 이어나갈 예정이다. 끝으로 영동이 던지는 자연스러운 플러팅은 정말 유혹적이었다. 내미는 손을 덜컥 잡을 정도로. 유후 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