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 3기
from 나연, 고향에 발 붙이는 중입니다

사는 곳은 서울이고요, 태어난 곳도 서울입니다.
"고향이 어디야?"
"나는 서울!"
"와, 부럽다! 그럼 명절에도 어디 안 내려가?"
서울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꼭 지방 친구들에게 '부럽다'는 말을 들어요. 하지만 반대로, 명절마다 시골 할머니 댁에 내려가는 친구들이 참 부러웠어요. 왜냐면 저희 친가는 용산구에, 외가는 영등포구에 있었거든요. 친척 언니들과 아이파크몰에 가거나, 사촌 동생들의 손을 붙잡고 타임스퀘어에 가는 것이 제가 아는 명절의 모습이었죠.
몇 달 전, 강원도 로컬 기업을 소개하는 매거진 <EAST>를 읽었습니다. '서울'에서 일하던 강원도 청년들은 '쳇바퀴 같은 삶'에서 벗어나 그들의 부모님과 친구, 그리고 집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그들의 고향 강원도에서 자기만의 일을 만들고 있대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고 있는 저는, 이 분주한 도심에서 탈출해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것에 문득 서운함을 느껴요. 가끔은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이나, <웰컴투삼달리>의 '삼달이'처럼 한적한 고향으로 훌-쩍 떠나는 상상도 합니다. "이 곳을 떠나도 나는 갈 곳이 있다"는 생각은 큰 버팀목이 되니까요.
'고향'이란 단어는 연고 고(故) / 시골 향(鄕) 자를 쓴대요. “시골만 고향인가?” 하는 심통스런 말대꾸를 해보며 나의 고향 ‘서울’에 발 붙이는 연습 중입니다.
뿌리서점 옆에는 우리 가족의 뿌리가 있고.
18세 소년에게 갑작스럽게 다가온 분단의 아픔은 '고향과 가족의 소실'로 이어졌어요. 평양에서 내려와 낯선 남한 땅, 용산구에 터전을 잡은 저희 할아버지는 만화 <검정고무신>에서 본 듯한 정겨운 주택 집에서 오남매를 훌륭히 길러내셨지요.

다섯 남매와 부부가 살던 마당 있는 집은 수리를 거쳐 4층짜리 상가 주택이 되었고, 세 딸은 시집을 갔어요. 첫째 아들은 어느덧 두 아이의 아버지가, 막내아들은 저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집에는 아홉 명의 식구가 살게 되었어요. 제가 무럭무럭 자라 4살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경기도로 이사를 갔습니다. 제가 태어났던 용산집은, 명절마다 내려오는 할아버지 댁이 되었고요.
용산역에서 내려와 드래곤힐스파를 지나, 소담한 골목으로 들어서면 우리 가족이 3대째 살던 그 집이 나옵니다. 이제는 통유리로 둘러싼 개인 카페가 생기며 상권이 살아나고 있지만, '뿌리서점'이라는 30년 된 헌 책방이 있는 오래된 골목이에요. 옆집에 사시는 할머니와 길에서 만나면 인사를 나누던, 그런 정겨운 골목이었죠.
빛 바란 책은 이곳의 세월을 감히 짐작게 한다.
내가 알던 용산은 핫플이 아니었는데!
작년에 다시 그 용산구로 돌아왔어요. 저는 24살이 되었고요.
"다시 돌아오는 데 20년이 걸렸네." 라며 읊조리던 아버지와 나란히 서서, 창 밖에 나지막히 일렁이는 한강을 보아도 '고향'이란 말이 실감나지 않는 이유는. 소란스러운 기차 소음, 그리고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가 들리는 여느 도심의 아파트이기 때문일까요? 건너편 골목은 '용리단길'이라는 별명과 함께 번화한 골목이 되었고, 부모님과 손 잡고 장을 보던 '용사의 집'은 고개를 힘차게 들어야 꼭대기를 겨우 볼 수 있는 고층 호텔이 되었습니다.
 | 평온함으로 감동이 충만한 곳에 가면 우리는 '마치 마음의 고향 같다'는 찬사를 하죠. 얼마 전, '뿌리'를 찾는 여정을 떠났어요.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친구와 헤어지고는, 자연스럽게 뿌리서점으로 발이 향했습니다. 이곳의 노란 간판은 어느덧 검은색이 되었고, 책방지기 할아버지의 아드님이 새로운 책방 지킴이가 되셨어요. 아직 원두커피의 맛은 모르면서도 남들 좋다는 건 따라 마셔보는 제게, '프림이 섞인 따뜻한 믹스커피'를 내어 주시는 뿌리서점 사장님. 우리 가족이 이 옆에 살았었다 말씀드리니 "아-!" 하며 알아보시더군요. 이제 저에게는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집도 실존하지 않기에. 내가 아닌 이 골목 또 다른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도 나의 고향이 살아 있기를 바라왔나 봐요. 그래서 이곳 뿌리서점이 더 애틋하게 느껴져요. 레스토랑 건물에 밀려 더욱 작아진 책방 입구가 오늘따라 더 눈에 밟힙니다. |

📖 뿌리서점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21길 25 | 둘째, 넷째 화요일 휴무)

로컬 에디터 3기
from 나연, 고향에 발 붙이는 중입니다
사는 곳은 서울이고요, 태어난 곳도 서울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꼭 지방 친구들에게 '부럽다'는 말을 들어요. 하지만 반대로, 명절마다 시골 할머니 댁에 내려가는 친구들이 참 부러웠어요. 왜냐면 저희 친가는 용산구에, 외가는 영등포구에 있었거든요. 친척 언니들과 아이파크몰에 가거나, 사촌 동생들의 손을 붙잡고 타임스퀘어에 가는 것이 제가 아는 명절의 모습이었죠.
몇 달 전, 강원도 로컬 기업을 소개하는 매거진 <EAST>를 읽었습니다. '서울'에서 일하던 강원도 청년들은 '쳇바퀴 같은 삶'에서 벗어나 그들의 부모님과 친구, 그리고 집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그들의 고향 강원도에서 자기만의 일을 만들고 있대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고 있는 저는, 이 분주한 도심에서 탈출해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것에 문득 서운함을 느껴요. 가끔은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이나, <웰컴투삼달리>의 '삼달이'처럼 한적한 고향으로 훌-쩍 떠나는 상상도 합니다. "이 곳을 떠나도 나는 갈 곳이 있다"는 생각은 큰 버팀목이 되니까요.
'고향'이란 단어는 연고 고(故) / 시골 향(鄕) 자를 쓴대요. “시골만 고향인가?” 하는 심통스런 말대꾸를 해보며 나의 고향 ‘서울’에 발 붙이는 연습 중입니다.
뿌리서점 옆에는 우리 가족의 뿌리가 있고.
18세 소년에게 갑작스럽게 다가온 분단의 아픔은 '고향과 가족의 소실'로 이어졌어요. 평양에서 내려와 낯선 남한 땅, 용산구에 터전을 잡은 저희 할아버지는 만화 <검정고무신>에서 본 듯한 정겨운 주택 집에서 오남매를 훌륭히 길러내셨지요.
다섯 남매와 부부가 살던 마당 있는 집은 수리를 거쳐 4층짜리 상가 주택이 되었고, 세 딸은 시집을 갔어요. 첫째 아들은 어느덧 두 아이의 아버지가, 막내아들은 저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집에는 아홉 명의 식구가 살게 되었어요. 제가 무럭무럭 자라 4살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경기도로 이사를 갔습니다. 제가 태어났던 용산집은, 명절마다 내려오는 할아버지 댁이 되었고요.
용산역에서 내려와 드래곤힐스파를 지나, 소담한 골목으로 들어서면 우리 가족이 3대째 살던 그 집이 나옵니다. 이제는 통유리로 둘러싼 개인 카페가 생기며 상권이 살아나고 있지만, '뿌리서점'이라는 30년 된 헌 책방이 있는 오래된 골목이에요. 옆집에 사시는 할머니와 길에서 만나면 인사를 나누던, 그런 정겨운 골목이었죠.
빛 바란 책은 이곳의 세월을 감히 짐작게 한다.
내가 알던 용산은 핫플이 아니었는데!
작년에 다시 그 용산구로 돌아왔어요. 저는 24살이 되었고요.
"다시 돌아오는 데 20년이 걸렸네." 라며 읊조리던 아버지와 나란히 서서, 창 밖에 나지막히 일렁이는 한강을 보아도 '고향'이란 말이 실감나지 않는 이유는. 소란스러운 기차 소음, 그리고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가 들리는 여느 도심의 아파트이기 때문일까요? 건너편 골목은 '용리단길'이라는 별명과 함께 번화한 골목이 되었고, 부모님과 손 잡고 장을 보던 '용사의 집'은 고개를 힘차게 들어야 꼭대기를 겨우 볼 수 있는 고층 호텔이 되었습니다.
📖 뿌리서점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21길 25 | 둘째, 넷째 화요일 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