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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김넝, 겨울을 닮은 이 봄에, 봄을 닮은 남해의 겨울을 떠올리며

겨울을 닮은 이 봄에, 봄을 닮은 남해의 겨울을 떠올리며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처럼 창가를 본다. 어김없이 창틀에 물방울이 맺혀있다. 촘촘한 구름에 볕 낄 틈 없는 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고양이들은 남향의 거실 대신 으슥한 옷장(겸 고양이 방)에 웅크리고 누워있다. 나라도 열심히 기지개를 켜보지만 날씨의 무거움 앞에 한없이 작아졌다.  

겨울을 닮은 3월이 지나고 있다. 수면잠옷과 양말로 온 몸을 꽁꽁 감싸고 있자니 문득 서러워진다. 지난겨울이 떠오른다. 얼음이 얼지 않아 빙산 축제가 취소된 겨울. 그 온기도 모자라 철새처럼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난 남해의 3박 4일을 기억한다.

^{두모마을은 장난감 마을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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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를 초대합니다

작년 봄 퇴사 후, 프리랜서로 활동하게 되었다. 혼자 일정을 짜고, 기록하는 일은 자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게 힘들어졌다. 온갖 핑계와 합리화를 벗어나기 위해 프리랜서 모임인 ‘프프즌’의 멤버가 되었다. 다양한 프리랜서들이 만나 각자의 일정을 공유하고 감시하며 시너지를 내는 모임이다. 좋은 정보가 있으면 커뮤니티를 통해 공유할 수 있는데, 수감자(프프즌 멤버는 서로를 수감자라고 부른다) 한 분이 프프즌 멤버에게만 선공개되는 특가 워케이션을 공유해주셨다. 그곳에서 ‘팜프라촌’을 알게 되었다. 남해 끝자락에 있는 팜프라촌에서는 일하다 지칠 때쯤 느직느직 바다를 산책할 수 있고, 남해의 따뜻한 바람 덕에 겨울에도 시금치 농사를 할 수 있었다. 직접 시금치를 따고, 담아가는 체험까지 할 수 있다니.

'워케이션, 바다, 시금치'

이 세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10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많았나 보다. 정신 차려보니 모니터엔 결제 완료 창이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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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숨소리

팜프라촌은 남해의 작은 동네 ‘두모마을’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두모마을을 둘러싼 바다는 은박지 사탕 껍질을 덮어놓은 듯이 잔잔하고 천천히 흘렀다. 언뜻 보면 가만히 멈춰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바다도 숨을 천천히 고르는데, 뭐가 그리 급해 나는 짧은 호흡만 몰아쉬었을까, 괜스레 호흡을 길게 들이마시게 된다. 안동보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숨과 섞였다. 그제야 평화로웠다.

^{은박지같은 남해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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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부기도, 코끼리도 아닌 코부기집

팜프라촌에 도착해 방을 안내받았다. 숙소의 서사는 특별했다. ‘젊은 청년이 기반 없이 시골에 내려와 살 수 있을까?’라는 단 하나의 의문으로부터 시작된 팜프라촌. 대표는 전 세계 농업을 경험하며, 청년 농사의 가능성을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농사든 뭐든, 우선 어디든 ‘살 곳’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느리고 단출하지만 튼튼하고 따뜻한 ‘코부기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뜻이 같은 청년들과 두 번의 집짓기 프로젝트 거쳐 지금의 팜프라촌이 완성되었다. 아직 청년의 의문은 현재 진행형이다.

^{팜프라 라운지와 코부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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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로도 머리를 감을 수 있구나 

코부기집의 원칙은 독특하다. 6평 남짓한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책상. 그 위에 비누 3개가 놓여있다. 초록과 빨강은 온몸을 씻는 만능 비누, 올리브색은 샴푸 비누, 하얀색은 주방 비누였다. 비누로 얼굴을 씻고, 머리를 감고, 설거지를 할 수 있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제야 지구와 오래도록 잘 지내고 싶다는 팜프라촌의 철학이 보였다. 차를 우려 마실 수 있는 1인용 다기, 수돗물을 받아두면 정수가 되는 브리타 정수기, 음식물을 퇴비로 만들어 쓴다는 안내 글 등. 물을 끼얹은 듯 쌓여있던 상식이 와르르 씻겨 내려갔다. 투명한 눈으로 이곳을 즐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코부기집 내부, 친환경 비누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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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도 어엿한 직원입니다.

^{인절미가 일도 대신 해준다. 당시엔 중성화한 지 얼마 안 돼서 환묘복 착용 중}

워케이션의 취지에 맞게, 라운지 겸 사무실이 9시부터 6시까지 문을 연다. 한 손 가득 노트북을 안고 라운지 문을 열면, 호랑이 무늬의 ‘낑깡’이 마중 나온다. 아, 마중이 아니고 바깥에 산책하러 가는 길을 내가 열어준 거구나. 뒤이어 치즈색에 하얀 발이 앙증맞은 ‘인절미’가 나온다. 낑깡이의 아들 고양이다. 이 녀석들 어디서 많이 봤나 했는데, 내가 코부기집에 들어가자마자 방에 침투해 꼼꼼히 살피던 아이들이었다. 고양이들의 일상을 잠시 살폈다. 마당 구석구석을 뛰어다니고, 손님 방을 일일이 체크하고, 라운지에서 뜨끈하게 몸을 지진다. 이토록 좋은 삶이 있나. 고양이 주제에 일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노트북 작업하는 내내 처음 보는 손님 무릎에 올라와 쿨쿨 잔다. 무릎이 따뜻해 잠이 쏟아지는 바람에 일이 잘 안되긴 했는데, 귀여워서 만사 오케이였다.

^{왼쪽부터 아빠 개냥이, 아들 인절미, 길쭉한 양배추, 엄마 낑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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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차나, 커피 드릴까요?” 

라운지에 자리를 잡으면, 직원분이 은은한 미소를 띠며 맞아주신다. 하필 내가 갔던 날 대표님(의문 많은 청년)이 제주도에 가셔서, 개인적으로 아쉬웠지만 직원들은 살짝 신난(?) 분위기였다. 이런 재미난 작업을 함께 해도 역시 대표님의 유무에는 차이가 있구나, 괜히 공감도 되고 웃겼다. 대표님은 못 만났지만, 스킨로션을 바르지 않는 채식주의자 스태프를 만났고, 요가를 사랑하며 팜프라촌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내는 직원분도 만났다. 남해가 좋아 진주에 집을 계약한 분과, 책방을 운영하는 젊은 사장님도 만났다. 혼자 온 내가 신경 쓰였는지, 같이 황태칼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제안해 주셨다. 그곳에서 남해 시금치밭 소년도 만났다. 3박 4일 동안, 연고는 없지만 남해가 좋아 정착하게 된 참 많은 청년들과 대화했다. 누구든 환영해 주는 이곳 분위기는 남해의 날씨보다 따뜻했다.

차는 언제나 팜프라촌 컵에 담아주신다. 왼쪽은 삼삼한 매력의 황태해장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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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닮은 겨울, 남해는 사계절이 푸르다

라운지의 길쭉한 창문 너머로 100평 남짓한 밭이 보인다. 겨울이지만 초록 식물이 무성하게 나 있고, 열심히 재배 중인 농부도 보였다. 초록 식물은 남해의 특산물 ‘시금치’였고, 농부는 이장님의 아내이자, 마을의 실세인 사무장님이셨다. 오전 시간 아직 땅이 얼어있을 때, 사무장님이 라운지에 잠시 들르셨다. 이미 팜프라촌의 어린 식구들과 마음을 터놓고 따뜻한 온기를 나눈 시간이 보였다. 실제로 청년들의 마을 정착을 위해 사무장님이 튼튼한 다리 역할을 해주셨다고 했다. 두모마을에 20년째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각이 열려있고,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빠져들었다. 저출생을 막기 위한 사무장님만의 다이나믹한 철학을 나눠주셨다. 해가 뜨고, 땅이 녹아 시금치 체험을 했다. 사실 시금치를 캔 기억은 희미하다. 사무장님과 나눈 대화와, 살짝 데쳐 먹은 시금치가 달고 맛있었던 기억이 워낙 강렬해서. 

^{시금치를 다 캔 후 개키는(다듬는) 시간에 수다를 떨며 지루함을 잊는다고 한다.}

겨울이지만 마당 사이사이 뜯어 먹을 수 있는 채소가 있었다. 비타민, 치커리, 상추, 브로콜리 등 종류별로 한두 개씩 뚝뚝 떼어왔을 뿐인데 한 끼가 뚝딱 완성되었다. 직접 재배한 작물을 요리해서 먹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팜프라촌에서 나는 ‘나의 행복’을 찾은 것 같다. 점심때가 되면 동네 친구들 하나둘 모아 단골 식당에서 후루룩 먹고 헤어지는 일상. 단순하고 소소하지만, 직접 내 손으로 해나가는 ‘분주함’과, 거기에 기꺼이 시간을 쏟아낼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갖는 것이 나의 행복이다. 

^{겨울에 얼었다 녹는 걸 반복하며 시들해졌다는데 내 눈엔 마냥 싱싱한 채소들}

남해의 겨울은 참 따뜻했다. 날씨 덕분이기도 하지만, 남해 식구들의 다정함과 황태해장국의 뜨끈함, 고양이의 포근함은 나에게 봄처럼 다가왔다. 겨울을 닮은 봄이 가고 따뜻한 계절이 오면 또 다른 팜프라촌을 탐방하고 싶다. 이 글을 보고 있을 탐방 식구들을 동네에서 만난다면 서로의 행복에 대해 묻고 답하고 싶다. 당신의 행복은 어떤 모습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