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 3기

from 원반인 히라, 원주와 서울 거리두기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이제는 나를 의심하지 않을 차례다.”

서울에서 원주로 왔다. 일자리나 가족이 있어서 온 건 아니다. 원가족으로부터 경제적인 독립을 하고 싶었다. 계속 회사나 기관에서 소속되어 있었으니 한 번쯤은 조직에 소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20대 후반~30대 초반에 걸쳐 광역시부터 군 단위의 작은 시골, 수도권이 아닌 중소도시 등 다양한 지역을 둘러보고 지역에 이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민이 긴 대신 결정은 빨랐다. 언젠가 겪을 일이라면 빨리 망하고 수습해서 나중에 더 잘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버릇처럼 말하던 ‘마흔 전 탈서울’을 상상했던 것보다 빨리 이뤘다. 미련 남은 살림살이를 이고 지고 온 지 3개월이 되었다. 원주에서 처음 보내는 겨울은 생각보다 길었다. 서울에서 일정을 마치고 원주로 돌아올 때 비에서 눈으로 바뀌는 온도 차이를 실감하며 오랜만에 감기도 걸렸다.

취업 하면서 서울에서 약 9년 정도 살았다. 영등포에서 첫 집을 구한 후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이사했다. 6년 후 다시 처음 살았던 동네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사를 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재건축을 결정한 집주인의 통보 외에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급격하게 오른 전세금에 밀리고 밀려 겨우 자리 잡은 곳에서 회사는 늘 멀었다. 왕복 두 시간이 넘는 통근 시간과 복잡한 2호선은 나의 인내심을 실험했다.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기 전부터 한껏 예민해지고 정신력을 소진해 버렸다. 

서울 살면서 유익한 경험도 많이 했지만, 일하는 10년 동안 워라밸(*work-and-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뜻)이 지켜졌던 적이 거의 없다. 주 5~6일을 늦은 시간까지 일하거나 종종 밤을 새우기도 했다. 성향 자체가 일을 좋아하는 워커홀릭이기 때문에 일이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게 좋았다. 그럼에도 한 사람의 몫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양을 해야 했고, 그에 따른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부당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새벽까지 사무실에 혼자 남아 이러다 ‘자살 아니면 과로사하겠다’는 생각까지 했던 적도 있다. 기본적인 일상을 지킬 힘도 없어 집에 있을 때는 대부분 축 늘어져 침대에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원주에서는 서울에서 살던 모습과는 좀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 ‘지금’을 선물하기로 한 것이다. 회사나 기관, 학교에 소속되어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던 시절, 마지막 직장에 입사하면서는 ‘열 번째 직업은 창직을 하겠어.’라고 결심했다. 사회 초년생을 벗어난 대신 경험이 쌓인 데다 새로운 시도를 할 에너지는 충분한 상태가 바로 지금이다. 이미 있는 자리와 역할 대신 나에게 맞는 직업을 만들고, 내 노동의 가치를 누군가 정해준 언어가 아닌 나의 언어로 정의하고 싶었다. 남들과 비교할 때 부족하다는 느낌만 들었던 ‘잘하는 일 찾기’ 대신 ‘좋아하는 일’에 더 가까워지기로 했다. 적어도 1년 동안은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고 내가 나의 소속이 되어 살아남는 게 목표가 되었다.

조직에 소속되어 있을 때는 회사나 기관의 필요에 맞는 일만 하다 보니 사업의 목적에 따라 결과가 성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누군가가 정해놓은 의미를 내 의미인 것처럼 따랐다. 지금은 결과보다 과정을 소중히 여기며 영상, 글, 음성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꺼내 기록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갈고 닦아온 여러 생존 기술을 조합해 활용하면서 지금까지는 잘 버티고 있다. ‘혼자 일하는 것보다 조직에서 일하는 게 더 맞겠다’라는 결론에 이르면 다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고치겠지만, 지금은 규칙적인 출퇴근에서 벗어나 자유와 불안 사이를 걷는 초보 독립 노동자로 살고 있다. 작년까지는 회사에 다니면서 의욕에 가득차서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를 때마다 적어두었는데, 그사이 바뀐 에너지 흐름으로 무작정 추진하기보다는 지속성을 생각하며 소화할 수 있는 만큼만 차근차근 실행한다. 목적 없는 즐거움 그 자체를 감각하며 ‘어떤 삶을 살 것인가’의 밑그림이자 기본기를 다지고 있다.

20대와 30대에 걸쳐 새로운 조직으로 이동할 때마다 3개월 이상 쉬어본 적이 없다. 마의 구간이 다가올수록 남은 한 해를 무엇으로 채울지 막막했다. 머리로는 예측불가능한 삶을 즐기고 싶었으나 막상 이 시기가 닥쳐오니 불안했다. 그럴 때마다 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노동의 대가를 받지 않을 뿐이고 예측이 어려울수록 가볼 만한 여정이라고 되뇌었다. 생각해 보면 덴마크로 워킹 홀리데이를 갔을 때도 농장에서 비자 받을 때까지 버티겠다는 계획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초기 비용도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금액만큼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원하는 시기에 비자도 잘 받고, 바리스타로 일하면서 토요일마다 한글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내가 살아왔던 환경에서 가장 반대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잘 살아남으면 더 이상 나의 생존 능력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원주에 오면서 나를 의심하지 않을 차례다.

그전에는 퇴사하면 해외로 여행을 떠났다. 다르게 살고 싶은 마음에 낯선 곳을 찾아가 일부러 헤매고 고생을 자처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평온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적당히 낯설기에 많은 자원을 들여서 떠나야 하는 여행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원주에 완전히 이주해 오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연습하고 있다. 아무리 원주에 여러 번 와서 반 원주사람이 되었다고는 해도, 결국 사는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사 후에 한 달 정도는 내가 원주에 이사를 온 건지 헷갈릴 정도로 서울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여전히 많은 관계는 서울에 있었고, 참여하던 프로젝트 회의와 결과공유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원주의 친구들은 나에게 ‘언제 원주에 있어?’라고 물어볼 정도였다. 서울에 갈 때는 며칠씩 가야 하니 여행 가듯 큰 가방을 챙겼다. 그때는 혼란스러운 마음이 앞서 ‘원주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계속 이렇게 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처음에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한 달 정도 지나자 자연스럽게 서울에 갈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다음날까지 일이 있지 않으면 되도록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이사 하기 전까지 살던 언니 집에서 잘 수도 있지만, 이제는 원주 집에서 자는 게 몸도 마음도 더 편했다. 필요하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드니 오고 가는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새로운 기준이 생긴 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원주 시내에서 서울에 있는 역이나 버스터미널까지, 다시 서울 안에서 이동하려면 최소 3시간은 걸리기 때문에 ‘꼭 필요한 일인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일정을 정하게 되었다. 꼭 가고 싶은 일에만 시간을 쓰고 그 시간을 충분히 누리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서울 가는 기차를 타면서 처음으로 ‘재밌다’고 느꼈다. 불편하고 복잡하기만 했던 서울이 생각만 해도 즐거운 곳으로 바뀌다니, 이 정도면 서울과 적당한 거리두기에 성공한 것 같다.

여전히 일은 서울에 많고, 원주에는 영화관이 몇 개 없어 멀리 가거나 먹고 싶은 빵을 찾으러 헤매야 하는 등 불편한 점도 있다. 그럼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붕 떠 있는 것 같은 기분보다는 내가 지금 원주에 있구나 라고, 살아가는 곳을 찬찬히 둘러보게 된다. 서울에 있을 때는 친구 집에 가는 경험을 별로 해본 적이 없는데, 원주에서는 밤늦게 일하고 돌아오는 나를 기다리며 맛있는 음식을 데워놓는 친구들이 있다. 새벽에 친구와 별을 보러 갈 수 있는 것도 차가 있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깊은 밤이 가까이 있는 원주에서 새벽에 깨어있는 허전한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덕분이기도 하다. 거돈사지에 가서 북두칠성과 쌍둥이자리를 찾고 주변을 둘러싼 산 능선의 연꽃 모양을 보는 몰랐던 재미도 발견했다. 별을 보러 갈 때만 하도 새벽에 추워서 추운 손끝을 주먹 쥐고 금방 돌아왔는데, 봄이 올 것 같지 않던 원주에도 드디어 초록 잎이 돋아난다. 

  <별 보이는 원주 부론면 거돈사지>

앞으로 벚꽃 명소가 될 원주 바람숲길>

* 원반인 히라: 반 원주 사람이라는 뜻으로, 원주 사람을 뜻하는 ‘원주인’과 대비해서 스스로 지은 별명이다. 원주에 오기 전에는 평일 5일은 서울, 주말 2일은 원주를 오고 가면서 이 정도면 반 원주 사람 정도는 되는 것 같아서 지었는데, 지역을 넘나드는 경계인의 정체성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