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 3기

from 원반인 히라, 모르는 길에서 모르는 꽃 봄

봄이 온다는 건 무채색의 휴대폰 사진첩이 점점 다양한 색깔로 물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때 유행했던 ‘엄마 아빠 SNS 프로필 특징.jpg’처럼 프로필 사진을 꽃이나 자연 사진으로 해놓으면 나이 든 증거라고 하던데, 아주 어릴 적부터 꽃무늬 옷을 즐겨 입던 나는 지금이나 그때나 푸릇한 자연에 담긴 꽃을 참 좋아한다.

원주에 올 때 여러 로망이 있었다. 탈서울을 꿈꾸면서 대도시의 줄지어진 아파트와 까마득한 높이의 빌딩에 가로막힌 하늘 대신 탁 트인 풍경을 보며 살고 싶었다. 아스팔트나 건물 바닥 대신 포슬포슬 흙을 딛고 만지는 일상을 꿈꿨다. 상상과는 조금 다른가? 차근차근 연습하다 보면 더 가까워지겠지. 원주는 강원도에서 가장 큰 도시이긴 해도 구도심에서 조금만 부지런해진다면 언제든 자연을 가까이할 수 있다.

말로 이리저리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인간이기에 단어에서 발견한 감각을 나만의 언어로 정의한 ‘희라 사전’을 차곡차곡 채운다. 그 사전에는 발바닥을 ‘기억기관’으로 설명한다. 낯선 장소에 가더라도 발바닥을 꾹꾹 눌러 딛고 다닐수록 피부와 마음으로 기억한다는 의미에서다. 특히 이 기억기관을 잘 활용한다면 여행이나 이주로 새로운 지역에 갔을 때 예민함을 장점으로 발휘하고, 걷다 보면 그 지역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마음도 두고 갈 수 있게 된다.

막상 와서 살겠다고 결심해도 그 말랑한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더 크게 한 발 한 발 내디뎌 걸어본다. 한겨울의 롱패딩 대신 허리까지 오는 바람막이를 입을 수 있을 때마다, 자주 흐린 날씨에서 집 앞 은행나무 너머 치악산 능선이 또렷해질수록 더 오래 천천히 걸어 다닌다.

작년에 집을 구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 우연히 기찻길 옆에 자리 잡은 집이 후보에 있었다. 가계약했던 집도, 마음을 바꿔 지금 살고 있는 집 근처에도 기찻길에서 공원으로 탈바꿈한 ‘바람숲길’이 있었다. 작년까지 계속 공사 중이었다가 겨울에는 거의 완성되어 요란한 움직임이 멈췄다. 기찻길을 드러낸 흔적과 덜 심어진 나무로 흙밭이었던 길이 지금은 앙상한 나무와 낮은 꽃으로 빼곡히 채워졌다.

3월인데, 여긴 여전히 겨울이다. 파싹 말라버린 가지와 미처 내려앉지 못해 만지면 바로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은 잎만 남은 나무가 줄지어 있다. ‘영산홍’이라는 어엿한 이름표와 달리 어두운 적색에 손톱보다 작은 이파리만 겨우 달려있다. 생이라곤 눈알을 아무리 굴려봐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꽃과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봄을 품고 있는 눈이 있다. 물이 필요 없을 것 같은 나무도 어느 계절이든 언제나 살아있다. 올 때마다 묘하게 이 눈이 조금씩 커지는 것 같다.

내가 살아가는 곳을 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겨우 지금 어디 서 있는지 알 뿐인데 안다고 해도 되는 걸까. 이름을 안다고 해서 아는 것일까. 아직 아는 것보다 알아가야 할 게 더 많은 원주에서 여전히 모르는 꽃 이름이 많다. 아무리 비가 와도 새싹 하나 나지 않는 이곳이 푸릇함으로 물들 날이 올까? 믿을 수 없을 때 마른나무에 바짝 다가가 털이 송송 나 있는 눈을 바라본다.

원주의 봄은 조금 천천히 온다던데. 원주 친구의 말에 따르면 치악산에 눈이 완전히 녹아야만 봄이 온다던데. 완연한 봄이 찾아왔을 때 나는 조금 더 이곳에서 지금, 발 딛고 살고 있구나 라고 느낄 수 있을까. 원주에서 만날 두 번째 계절, 곧 봄이 온다.

<곧 봄이 찾아올 원주 바람숲길*>

*바람숲길: 도심에 위치한 (구)원주역 중앙선 폐철길을 따라 조성된 산책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