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 4기

from 별별ㅣ원하지 않는 순간까지도 결국, 내 삶이라는 것

특이한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작년 말부터 조카 세 명, 언니네 부부와 같이 사는 특이한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작년 말은 제게 굉장히 힘든 시기였는데요. 이보다 더 바닥이 있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마음이 왈칵 무너진 때였거든요. 그때까지의 저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달려왔어요. 아닌 척하는 마음 뒤에는 사실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거든요. 

하지만 모든 게 갑작스럽게 무너졌고, 허탈했죠. 문득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회사생활도, 서울살이도요.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친언니는 아주 흔쾌히 말했어요. 나는 집을 따로 얻어서라도 너와 살았을 거라고, 전혀 미안해하지 말라고요. 그렇게 용인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느덧 7개월 차, 이제는 조카들과 비밀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예요.

이 곳에서 어느 때보다도 평안한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도 강건해지고 있습니다. 혼자 사는 것 못지않게 함께 사는 걸 행복해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됐어요. 하지만 늘 마음 한편에는, 이곳을 금방이라도 떠나고 싶었습니다. 제게 공간이라는 것은 늘 중요한 의미였거든요. 나답게 꾸민 집, 좋아하는 분위기를 가진 동네. 그런 '나다운 삶'과는 지금의 삶이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탐방에서, 이 문장을 만났습니다.

“제가 전에는 늘 어떤 장소에 대한 갈망이 진짜 많았어요. 내가 어딘가에 가면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아니면 나는 지금 여기이기 때문에 이런 거야, 지금 어딘가로 떠나야돼라는 갈망이 진짜 컸는데, "그런 장소는, 그러니까 그런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걸 한 번 인지한 이유로 어딘가에 가지 않더라도 내가 (일상을 위한) 장소를 만들면 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 엉겅퀴님의 <언덕> 인터뷰 中 - 

원하지 않는 순간까지도 결국, 내 삶이라는 것

마치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어요. '나는 지금 여기이기 때문에 이런 거야, 지금 어딘가로 떠나야 해.' 제가 늘 하던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런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서울을 떠나올 무렵엔 막연히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것을 꿈꿨거든요. 괜찮아진 지금은 또 나다울 수 있는 공간을 그리워하고 있었어요. 낙원은 과연 장소로서 존재하는 걸까요?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의 저변을 들여다봤어요. 그 끝에는 지금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장소에서의 일상을 소중히 여기지도 않았고요. 책상을 네 번이나 바꿔가며 인테리어를 하는 제가, 방을 건드리지도 않았다는 게 그 방증이었습니다. 갑자기 스스로에게 미안해지더라고요. 원하지 않는 순간까지도 결국, 다 제 삶인데 말이에요. 

가장 먼저 할 일이 떠올랐습니다. 쓰고 있던 방에 커튼을 달았어요. 처음부터 달고 싶었지만, 금방 떠나겠지 싶어 미뤄왔거든요. 커튼만으로도 방이 순식간에 아늑해지더라고요. 대청소를 했습니다. 쓰지 않는 것들은 처분하고, 구석구석 깔끔하게 정리를 했어요. 평소에 자주 쓰던 물건들을 취향이 담긴 것들로 바꾸었습니다. 작은 공간이나마 '나의 공간'으로 의미를 갖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돌이켜보니, 곳곳에 저의 일상을 이루는 장소들이 있더라고요. 언젠가 이곳을 떠나고 이 시간을 돌이켜볼 때, 추억하게 될 장소들이었어요. 대단하지 않지만 저만 아는, 제게는 의미 있는 공간들. 용인살이에서의 그런 소소한 장소들을 여러분에게도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나만의 일상을 위한 장소들

1_ 아파트 안의 숲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에요. 언니네 반려견을 산책하면서 알게 된 장소인데요. 여길 처음 보자마자 숲 같다! 라고 생각했답니다. 가끔은 풀숲에 둘러싸인 벤치에 앉아서 그냥 멍 때리기도 해요. 비 오는 날에는 더 운치 있어집니다.

2_ 길목의 정감가는 집

자주 다니는 길목에 있는 주택입니다. 요즘 자주 도서관을 다니는데요, 돌아오는 길엔 종종 꼭 이 골목을 들러 보곤 합니다. 거주하시는 분께는 실례지만, 사실 처음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인가 했었거든요. 외관이 허름하고 대문이 없어서요.

그런데 언젠가 와보면 어떤 때는 작은 나무가 심어져 있고, 어떤 때는 또 상추가 심어져 있고 하더라고요. 환하게 핀 장미를 본 어느 날엔 조금 더 오래 이 집을 바라보다 갔답니다. 이 집에 사는 이는 남들의 시선과 상관없이 자기만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 사람일 거란 생각을 했어요. 얼굴도 모르는 그분이 환하게 핀 장미를 예뻐라 하고, 상추를 따다 신선한 요리를 해먹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3_ 달리는 길의 이정표

달리기를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밤을 가로지를 때가 좋아요. 생각해보면 달리기를 할 장소는 제게 중요한 생활의 영역이었습니다. 서울살이 시절 방학역에 살 땐 방학천에서 자주 뛰었고, 신촌역에 살 때는 경의선 숲길을 다녔답니다. 이곳에서는 집과 가까운 탄천이라는 곳을 자주 뜁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이쯤이면 몇 키로겠거니 하고 가늠할 수 있어요.

빛샘전자라는 간판이 보이는 여기까지가 저한테는 3.5km 구간입니다. 다시 돌아가면 된다는 신호죠. 꼭 이쯤에서 이름 모를 긴 부리의 새와, 때로는 길 한복판에 갑자기 서 있곤 하는 겁 없는 두꺼비를 종종 마주칩니다. 조카한테 토끼풀을 엮어 반지를 만들어줬던 곳도, 숨이 차도 재잘거림을 받아주면서 같이 뛰었던 곳도 다 여기네요.

4_  집, 그리고 나의 공간

그리고 집. 첫째 조카 방인데 함께 쓰고 있어요. 저기 보이는 낮은 서랍장은 원래 없던 것을 당근으로 들였어요. 왼쪽에 빼꼼 보이는 건 이번에 새롭게 단 커튼입니다. 처음에는 굳이 커튼을 칠 필요가 있느냐고 하던 언니가, 설치하고 나서는 아늑하다며 제일 좋아해요. 알록달록한 이불을 치우고 제 이불을 갖다놨어요. 자는 공간에 민감한 편인데요, 다행히도 제 이불과 매트리스 크기가 딱 맞아 제 이불로 교체해 놓았습니다. 내 공간이라는 느낌을 주는 데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고마운 녀석입니다.

마치며

지금 머무시는 그 공간에서, 여러분만의 일상의 장소는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살고 계신 곳에 만족하시는지, 혹은 떠나고 싶으신지도요. 한 뼘 작은 공간이라도, 여러분만의 공간이 있기를 바라요. 그래서 어디에서건 소소한 일상의 장소들을 갖고 평온하시길 바라봅니다. 설사 원치 않는 순간일지라도, 모두 여러분의 삶이니까요. 용인에서 온기를 보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