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 4기
from 챔송ㅣ사람에서 사람으로: 권윤덕 작가와 용맹호

요즘 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조자』를 읽고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이 각본과 제작을 맡은 HBO 드라마의 원작소설이기도 하죠. 소설은 베트남 전쟁이 끝나갈 무렵을 배경으로 시작하는데, 읽다 보니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삼은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권윤덕 작가의 그림책 『용맹호』입니다.

권윤덕 작가는 '국내 그림책 작가 1세대 대표주자'로 손꼽힙니다. 화려하고 세밀한 민화풍 그림 속에 현대사에 대한 성찰과 고민을 녹여낸 작품이 많지요. 그는 경기도 오산 출신이지만 안양 지역과 연이 깊습니다. 안양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부터로, 당시 젊은 미술가였던 권윤덕은 김재홍, 이억배 등 동료 작가들과 함께 '안양지역 젊은 미술가그룹 - 우리들의 땅'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사회 참여적인 미술 활동을 활발히 펼쳤습니다. 이들은 안양시민미술학교를 개설하여 시민들과 함께 독서회, 민요연구회 등을 운영하는 등 지역 예술이 꽃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후 이 작가들이 대거 그림책 분야로 무대를 넓히면서 시민들은 그림책 작가로서의 권윤덕을 만나게 됩니다. 『만희네 집』, 『시리동동 거미동동』 등 한국 그림책계의 스테디셀러가 그의 손에서 나왔죠. 『용맹호』는 권윤덕 작가의 근작입니다.
『용맹호』의 주인공은 베트남전 참전군인 출신인 한국인 '용맹호'인데요, 작품을 읽기 전에는 인터넷에서 보았던 미국인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말이 떠올라 잠시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대략 "미국인들은 너희 나라를 다 쓸어버린 후 몇십년 뒤 자신들이 너희 어린이들을 쏘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회고하는 영화를 만들 것"이라는 내용이었는데, 아마 이라크전을 비판하면서 나온 발언이었던 것 같습니다. 베트남전과 한국은 어떨까요?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현지 민간인들에 대해 저지른 일을 직시하자는 움직임은 시민사회와 학계 등을 중심으로 계속 있어 왔지만 아직 많은 한국인들이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직 자기연민에 빠질 때가 아닙니다.
『용맹호』는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나'에 주목하는 대신, 죄를 저질렀던 사람이 일생 동안 짊어져야 하는 죗값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면지와 표제지의 삽화에서부터 주인공 용맹호의 일상에 숨겨진 죄책감과 어두움을 드러냅니다. 그는 감정조절에 문제를 겪고 있으며, 가족들도 그를 버리고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일상은 푸른 하늘이나 떠가는 구름처럼 평온해 보이지만, 백분토론 같은 TV 프로그램이나 길에서 마주친 아기 엄마의 존재만으로도 산산조각날 정도로 위태롭습니다. 용맹호가 베트남에서 죽이고 훼손하고 침해한 자들의 신체는 그의 정신에 붙어 그를 두고두고 거꾸러뜨립니다.

시민들과 젊은 예술가들이 동고동락했던 민중미술의 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에도 권윤덕과 안양의 연은 이어져 왔습니다. 2011년에는 안양의 로컬 예술단체인 '스톤 앤 워터'와 손을 잡고 아시아 작가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그는 사계절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이 프로그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베트남에서 한 달 동안 머물 수 있는 아시아 작가 교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지 않겠냐는 것이었어요. 반가웠고, 그래서 곧바로 응했지요. 어릴 때 마주치던, 쇠갈고리 손 상이군인에게서 어렴풋이 느꼈던 베트남.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노래. 대학교 1학년 공부 모임에서 읽은 통킹만 사건의 진상, 그리고 『꽃할머니』를 준비하면서 찾아보았던 베트남 밀라이마을의 성폭력 피해자 사진들.... 이런 기억들과 함께 그해 7월 20일, 그림 도구를 싸 들고 베트남으로 향했어요. 그렇게 시작했던 작업을 10년이 지나서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온 작품이 바로 『용맹호』입니다.
경기 남부의 도시에서 평범하게 살고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던 미술가는, 베트남에 사는 역시 평범한 사람들 - 그러나 전쟁이라는 벼락 같은 비극을 감당해야 했던 사람들 - 을 위해 10년에 걸친 작업 끝에 그림책 한 권을 내어 놓습니다. 안양의 한 공장에서 일하다 죽은 노동자들을 위한 영정도를 그리던 1980년대부터, 외국 군대에게 희생된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그림책을 그리는 2020년대까지, 권윤덕의 행보는 언제나 일관된 메시지를 보여 줍니다. 예술은 약하고 평범한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사회와 시대의 아픔을 대신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살아 가든 예술의 위로는 모든 사람에게 가 닿는다는 것을요.
<참고자료>
안양지역도시기록연구소 anyangbank.tistory.com
사계절출판사 www.sakyejul.net [작가 인터뷰] <용맹호> 권윤덕 작가, 2021.10.14.
최현미, 「권윤덕 : [만희네 집], [시리동동 거미동동]의 작가」, 네이버캐스트 -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
김지은, 「<어린이 책> 베트남전 참전했던 아저씨에게 무슨일이…」, 『문화일보』, 2021.10.15.
정자연 기자, 「[경인지역 민중미술 이끈 소집단 활동가를 찾다] 1. ‘그림사랑동우회 우리그림’ 권윤덕 작가」, 『경기일보』, 2020.01.14.
김범수·김소연 기자, 「[100℃ 인터뷰] 한국 그림책 작가 대표주자 권윤덕씨」, 『한국일보』, 2012.04.25.

로컬 에디터 4기
from 챔송ㅣ사람에서 사람으로: 권윤덕 작가와 용맹호
요즘 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조자』를 읽고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이 각본과 제작을 맡은 HBO 드라마의 원작소설이기도 하죠. 소설은 베트남 전쟁이 끝나갈 무렵을 배경으로 시작하는데, 읽다 보니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삼은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권윤덕 작가의 그림책 『용맹호』입니다.
권윤덕 작가는 '국내 그림책 작가 1세대 대표주자'로 손꼽힙니다. 화려하고 세밀한 민화풍 그림 속에 현대사에 대한 성찰과 고민을 녹여낸 작품이 많지요. 그는 경기도 오산 출신이지만 안양 지역과 연이 깊습니다. 안양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부터로, 당시 젊은 미술가였던 권윤덕은 김재홍, 이억배 등 동료 작가들과 함께 '안양지역 젊은 미술가그룹 - 우리들의 땅'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사회 참여적인 미술 활동을 활발히 펼쳤습니다. 이들은 안양시민미술학교를 개설하여 시민들과 함께 독서회, 민요연구회 등을 운영하는 등 지역 예술이 꽃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후 이 작가들이 대거 그림책 분야로 무대를 넓히면서 시민들은 그림책 작가로서의 권윤덕을 만나게 됩니다. 『만희네 집』, 『시리동동 거미동동』 등 한국 그림책계의 스테디셀러가 그의 손에서 나왔죠. 『용맹호』는 권윤덕 작가의 근작입니다.
『용맹호』의 주인공은 베트남전 참전군인 출신인 한국인 '용맹호'인데요, 작품을 읽기 전에는 인터넷에서 보았던 미국인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말이 떠올라 잠시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대략 "미국인들은 너희 나라를 다 쓸어버린 후 몇십년 뒤 자신들이 너희 어린이들을 쏘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회고하는 영화를 만들 것"이라는 내용이었는데, 아마 이라크전을 비판하면서 나온 발언이었던 것 같습니다. 베트남전과 한국은 어떨까요?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현지 민간인들에 대해 저지른 일을 직시하자는 움직임은 시민사회와 학계 등을 중심으로 계속 있어 왔지만 아직 많은 한국인들이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직 자기연민에 빠질 때가 아닙니다.
『용맹호』는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나'에 주목하는 대신, 죄를 저질렀던 사람이 일생 동안 짊어져야 하는 죗값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면지와 표제지의 삽화에서부터 주인공 용맹호의 일상에 숨겨진 죄책감과 어두움을 드러냅니다. 그는 감정조절에 문제를 겪고 있으며, 가족들도 그를 버리고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일상은 푸른 하늘이나 떠가는 구름처럼 평온해 보이지만, 백분토론 같은 TV 프로그램이나 길에서 마주친 아기 엄마의 존재만으로도 산산조각날 정도로 위태롭습니다. 용맹호가 베트남에서 죽이고 훼손하고 침해한 자들의 신체는 그의 정신에 붙어 그를 두고두고 거꾸러뜨립니다.
시민들과 젊은 예술가들이 동고동락했던 민중미술의 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에도 권윤덕과 안양의 연은 이어져 왔습니다. 2011년에는 안양의 로컬 예술단체인 '스톤 앤 워터'와 손을 잡고 아시아 작가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그는 사계절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이 프로그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베트남에서 한 달 동안 머물 수 있는 아시아 작가 교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지 않겠냐는 것이었어요. 반가웠고, 그래서 곧바로 응했지요. 어릴 때 마주치던, 쇠갈고리 손 상이군인에게서 어렴풋이 느꼈던 베트남.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노래. 대학교 1학년 공부 모임에서 읽은 통킹만 사건의 진상, 그리고 『꽃할머니』를 준비하면서 찾아보았던 베트남 밀라이마을의 성폭력 피해자 사진들.... 이런 기억들과 함께 그해 7월 20일, 그림 도구를 싸 들고 베트남으로 향했어요. 그렇게 시작했던 작업을 10년이 지나서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온 작품이 바로 『용맹호』입니다.
경기 남부의 도시에서 평범하게 살고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던 미술가는, 베트남에 사는 역시 평범한 사람들 - 그러나 전쟁이라는 벼락 같은 비극을 감당해야 했던 사람들 - 을 위해 10년에 걸친 작업 끝에 그림책 한 권을 내어 놓습니다. 안양의 한 공장에서 일하다 죽은 노동자들을 위한 영정도를 그리던 1980년대부터, 외국 군대에게 희생된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그림책을 그리는 2020년대까지, 권윤덕의 행보는 언제나 일관된 메시지를 보여 줍니다. 예술은 약하고 평범한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사회와 시대의 아픔을 대신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살아 가든 예술의 위로는 모든 사람에게 가 닿는다는 것을요.
<참고자료>
안양지역도시기록연구소 anyangbank.tistory.com
사계절출판사 www.sakyejul.net [작가 인터뷰] <용맹호> 권윤덕 작가, 2021.10.14.
최현미, 「권윤덕 : [만희네 집], [시리동동 거미동동]의 작가」, 네이버캐스트 -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
김지은, 「<어린이 책> 베트남전 참전했던 아저씨에게 무슨일이…」, 『문화일보』, 2021.10.15.
정자연 기자, 「[경인지역 민중미술 이끈 소집단 활동가를 찾다] 1. ‘그림사랑동우회 우리그림’ 권윤덕 작가」, 『경기일보』, 2020.01.14.
김범수·김소연 기자, 「[100℃ 인터뷰] 한국 그림책 작가 대표주자 권윤덕씨」, 『한국일보』, 2012.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