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 4기

from 탐스터ㅣ차별없는 여름을 위하여

(좌) 커뮤니티 X에서 화제가 된 밈 | (우)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여름의 모양새

'여름이었다'

어떠한 문장 뒤에 가져다 붙여도 아련해지는 요술멘트로 유명해진 이 말, 들어보신 분들 많으시지요? 각종 커뮤니티는 물론 방송 프로그램, 심지어 동명의 노래 제목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여름이 주는 아릿한 이미지에 공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잠시 눈을 감고 여름을 떠올려 볼까요. 머릿속에 두둥실 떠오르는 여름의 아이콘, 여름의 심상이 있을 거예요. 얼음이 반쯤 녹아 송글송글 물이 맺힌 아메리카노, 갑자기 솨아아 쏟아지는 시원한 여름비. 열기가 살짝 가라앉은 저녁 공기를 맞으며 꿀꺽꿀꺽 들이키는 맥주 한 캔, 풋내음 나는 여름 과일과 채소 같은 것이요.

마치 지금 내가 그 장면에 있는 듯한 황홀한 상상. 모두가 동의할 여름 같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름을 의문한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지 싶을 수 있습니다. 조금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를 구성하는 신체/정신적 조건, 내 '정체성'이 사회의 주류와 일치할 때만이 온전히 그 여름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슬프게도 미디어에서 얘기하는 계절, 너무나 당연해보이는 여름은 어쩌면 누군가만 향유하는 계절일 수도 있는 것이죠.

얼마 전에 홍콩에 다녀왔습니다. 여름 풀내음이 나는 구룡공원 벤치에 앉아 한참을 멍때리다가, 어딘가 이질적인 모습에 눈을 깜빡였습니다. 저에겐 아직은 낯선, 정말 '다양한' 사람이 여름을 즐기고 있더라구요. 피부가 하얀 사람, 어두운 사람, 보호자와 함께 걷는 사람, 휠체어를 탄 사람. 색깔 점들이 점묘화마냥 홍콩 시가지를 구성하는 한 풍경으로 자연스레 녹아들어갑니다.

그 순간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물음표들이 머리를 헤집고 들어옵니다. 과연 한국의 여름은 홍콩의 여름처럼 점묘화였나? 내가 이 동네에서, 연희동에서 못 봤던 사람들은 여름에 어떻게 지낼까?

좋은 건 함께 나누고 머리를 맞대 발전시키는 로컬, 제가 지향하는 사회의 궁극적 방향입니다. 제가 사는 연희동에는 사회의 주류가 아닌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누리는 것은 당신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모두가 공감하는 가치, 모두가 느끼는 여름을 위해 뭉친 연희동 가게를 소개합니다.

📍 모두에게 시원한 냉커피를, <보틀라운지>

위치: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26 1층

'사랑은 은하수 다방 문 앞에서 만나 / 홍차와 냉커피를 마시며 / 매일 똑같은 노래를 듣다가 온다네.'

10cm의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라는 노래의 첫 소절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사랑을 꿈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모두가 무더운 여름을 이겨낼 홍차와 냉커피를 즐길 수 있도록, '차별없는 가게'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는 카페 보틀라운지 를 찾았습니다. <차별없는가게>는 사회적 소수자가 지역사회에서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하나의 개인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동네 식당이나 카페 등 일상에 가까운 가게로부터 약속받아 지도에 표시하는 프로젝트*예요. 

*차별없는가게 웹페이지 발췌

보틀라운지에는 비건 푸드는 물론, 반려동물과 함께 카페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반려동물 전용 메뉴까지 준비되어 있어요. 비건 버섯 파니니와 보리 미숫가루를 주문하면서, 차별없는 가게 웹페이지에서 점자 메뉴판에 대한 설명을 본 것 같아 카운터에 양해를 구하고 살짝 여쭤보았어요. 

원래 보틀라운지에서는 점자 메뉴판을 함께 제공했다고 해요. 하지만 메뉴가 바뀌고, 가격이 변동될 때마다 점자 메뉴판을 새롭게 제작하는 게 운영상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보틀라운지에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공간 속에서 온전히 쉼을 느낄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휠체어를 탄 사람도 가게에 들어갈 수 있도록 고정식 경사로가 입구에 설치되어 있어요. 또한, 성중립화장실을 통해 성소수자는 물론 혼자서 화장실을 이용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성별이 다른 보호자와 안전하게 동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여름 맛 좀 볼래?! <위어도우 Weirdough>

위치: 서울 서대문구 증가로 80 2층 201호

마리 앙투와네트가 그랬다지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물론 가짜 명언이지만요. 잠깐만, 그런데 빵도 케이크도 못 먹는 사람들은 뭘 먹나요?

음식을 가리는 건 비단 기호에 의한 편식 때문은 아니에요. 지키고 싶은 신념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특정 재료가 건강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반드시 피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가까운 친구 중 하나는 당뇨 때문에 식단을 제한해야 하고, 저조차도 유당불내증과 계란 흰자 알러지가 있어 즐길 수 있는 음식이 한정적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제철 음식을 마음껏 탐미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마음 편히 여름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답니다. 별난(weirdo) 제 위장도 너그러이 받아줄 것만 같은, 연희동의 아늑한 피자집 위어도우Weirdough 에요. 

작명 센스부터 엄청난 이 피자집은 여름에 진심입니다. 보이시나요? 모두의 입에 여름을 한가득 떠먹여주고 싶어 안달난 것 같은 이 메뉴 라인업이요. 여름 특별 메뉴인 여름채소 화덕구이, 매일매일 가장 맛있는 제철 재료로 만드는 오늘의 작은 샐러드와 스페셜 디저트까지! 방문한 날은 여름 맛을 한껏 뽐내는 복숭아가 준비돼 있었습니다.

후천적으로 유제품을 못 먹게 된 저, 최소한의 착취를 지향하는 제 친구, 최애 음식이 피자임에도 과민성 대장 증후군으로 언젠가부터 피자를 멀리하게 됐다는 우리 삼촌까지. 자연에서 얻은 제철 채소 메뉴와 직접 만든 식물성 치즈를 사용한 비건 피자로, 모두가 위어도우에서 여름을 맛볼 수 있어요. 

📍 한 여름밤의 독서, <밤의서점>

위치: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567-8 1층

여름이 왔음을 언제 느끼시나요? 시장에 커다란 통수박이 놓이고, 인기 차트에 트로피컬한 음악이 올라올 때인가요? 100% 밖순이인 저는요, 아무래도 에어컨이 있는 실내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 바야흐로 여름이라고 느낀답니다.😅

여름 하면 역시 실내입니다. 그 중에서도 한여름 망중한을 만끽하기엔 책 한 권보다 좋은 게 없다 봅니다. 가만히 앉아 책 속에 잠겨드는 시원한 독서 시간, 누군가에게는 접근성 좋은 선지 중 하나이지만 모두에게는 아닐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왜 못 했을까요. 여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책과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연희동에서 버스로 10분 정도 위로, 이대부고 쪽으로 달려 도착한 <밤의서점>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리는 <밤의서점>은 개인적으로도 참 애정하는 곳입니다. 모든 곳에서 방문자에 대한 배려를 느낄 수 있어, '한 인격체로서 아낌받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여실히 받을 수 있어요. 

공간 얘기부터 해 볼까요. 동네의 차별없는 가게를 찾아다니며 깨달은 점은, 가게를 경험하는 첫 관문인 '입구'부터 접근이 순탄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염원했던 문턱 없는 입구를 밤의서점에서 드디어 찾을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책장과 책장 간의 간격이 널찍해 보다 다양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편한 마음으로 책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어떤 서점들은 저 하나조차도 게걸음을 하며 책장 사이를 돌아다녀야 하기도 하거든요. 

<밤의서점>에서는 서점에 자주 들르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이메일 뉴스레터도 받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한번도 서점에 들러보지 않은 로컬 주민들을 위해 직접 입간판을 만들어 세우고, 우체통을 통해 누구든 밤의서점 라이브 방송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끔 하는 세심한 애정까지 갖춘 곳입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서점이에요.

*사진 출처: 밤의서점 인스타그램 @librairie_de_nuit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위해 공통의 가치를 느끼게 할 수 있도록 힘쓰는 연희동과 그 인근 가게들을 둘러보았어요. 어쩌면, 정말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과 여름을 나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당장 가게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시설을 우겨넣자는 것도 아니고, 메뉴를 죄다 갈아바꾸라는 비현실적인 방법도 답은 아니에요. 다양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도록 옵션을 하나씩 차근차근 추가해나가는 것이 모두가 공감하는 여름에의 첫걸음일 거라 생각해요. 

그 걸음들이 모여 가랑비에 옷 젖듯, 화선지에 물감 번져나가듯 누구에게나 당연한 여름을 위한 로컬이 되길 바라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