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로컬 잇기

from 유일ㅣ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사람의 동네

"빨리 걷지 않아도 괜찮아"

서울 제기동에서 만난, 조금 느린 하루

서울의 속도는 빠릅니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사람들은 발걸음을 재촉하고, 거리엔 늘 급한 표정이 넘칩니다.
하지만 제기동은 조금 다릅니다. 이곳에서는 시간을 재촉할 필요가 없습니다.
골목마다 오래된 상점들이 숨을 쉬고, 천변을 따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여유가 묻어납니다.
'사람이 사는 동네'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 제기동의 오늘도 느긋한 하루를 살아갑니다.

📍탐방 루트

추천 코스ㅣ제기동역 → 경동시장 → 서울약령시장 → 스타벅스 경동1960점 → 정릉천 → 선농단역사공원

 🧭 오래된 시장, 살아있는 골목

제기동은 여전히 '시장'으로 하루가 시작하는 동네입니다.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에서 내리면 양손에 장바구니를 든 어르신들이 천천히 시장으로 향하는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일까요. 2023년 서울교통공사 자료에 따르면, 서울 지하철역 중 65세이상  승객 비율이 가장 높은 역은 의외로 제기동역이었습니다.

제기동의 중심에는 전통과 맥을 이어가는 경동시장과 서울약령시장이 있습니다. 

걸음을 옮기다 보면, 감초, 황기, 숙지황 같은 한약재들이 쌓인 진열대가 눈에 들어오고, 시장 골목에는 특유의 향이 가득합니다. 이 시장은 대형 쇼핑몰 처럼 한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걸을수록 새로운 가게가 나타나는 구조로 시간이 만든 구불구불한 동산은 발길을 늦추게 만들고, 마치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작은 박물관을 걷는 기분을 줍니다.

ⓒ유일

☕극장이었던 카페에서 잠시 쉬어가기

시장 골목을 걷다보면, 뜻밖의 풍경이 나타납니다. 30년 동안 문을 닫았던 '경동극장. 

한때 이곳은 주민들이 영화를 보던 극장이었지만, 지금은 스타벅스 경동1960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리모델링 과정에서도 계단식 객석 구조와 콘크리트 벽면 같은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이곳에 앉아 있으면 마치 오래된 영화 속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을 줍니다. 어르신들이 시장을 보러 나왔다가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젊은 손님들은 인증사진을 남기며 추억을 쌓습니다. 

세대와 시간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공간. 이곳은 카페라기 보다, 삶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장면 같습니다.

ⓒ유일

🚂 철길 위에 지어진 집들, 정릉천변 경춘선의 흔적

시장을 지나 정릉천 쪽으로 나가면, 또 다른 제기동의 풍경을 만나게 됩니다. 

다닥다닥 붙은 주택들 사이로 흐르는 정릉천. 조금 낯선 이풍경은 사실 폐선된 경춘선 철길 위에 세워진 집들이에요.

과거 서울과 춘천을 오가던 기차의 시작점이 성동역이었고, 이 기차 덕분에 바로 옆 경동시장도 성장할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철길은 사라졌지만,  이 천변 길은 평일 낮에도 조용하고 한적합니다. 도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느긋한 리듬이 흐릅니다.

마치 도시 한가운데 숨어있는 작은 시골 마을 같은 풍경 덕분에 제기동은 '서울 속 작은 마을'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겠지요.

ⓒ유일

🌾 '제기동'이라는 이름에 담긴 이야기

혹시 '제기동'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을까요? 

'제기동'이라는 이름은 '제사(祭)를 지낸 터(基)' 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임금이 농사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직접 밭을 갈고 제사를 지냈던곳,  '선농단(先農壇)'이 이 곳에 있었지요. 

지금은 선농단역사공원과 선농단역사문화관이 조성되어, 누구나 이 동네의 뿌리와 이야기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유일

💬 가끔은 느리게 걷는 하루도 괜찮으니까요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 속에서도 제기동은 여전히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시장을 천천히 걷고, 옛 극장에서 커피를 마시고, 천변을 따라 여유롭게 산책하고, 오래된 역사 앞에 조용히 멈춰 서는 하루. 

가끔은 그런 느린 하루가 우리를 더 단단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말, '빨리 걷지 않아도 괜찮은 동네' 제기동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유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