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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나무야ㅣ몰입의 순간을 찾아서

여러분은 쉬는 날을 어떻게 보내시나요? 저는 쉬는 날이 생기면 그날을 ‘몰입’을 위한 날로 쓸지, ‘휴식’을 위한 날로 쓸지 먼저 정합니다. 9월 25일은 ‘몰입’을 위한 날이었는데요, 청량리에서 보낸 제 몰입의 순간들을 함께 따라와 보세요!

홍릉숲; 나무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시간

몰입의 장소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숲입니다. 마음의 여유를 찾고 산책하기에도 좋지만, 나무와 작은 생명체 각각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숲에 몰입하게 됩니다. 홍릉숲에서는 숲 해설을 제공하는데, 잠시 나에게서 벗어나 숲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어 해설을 신청했습니다.

숲 해설은 몰입의 날에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가만히 서 있는 나무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듣자니, 꼭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나무들에 더 애착이 가기도 했지요. 이곳에서 처음 발견되어 표본목이 된 문배나무, 죽은 가지에서만 향이 나는 나무, 유명 나무의 후계목들, 생김새가 비슷하여 나도밤나무와 너도밤나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나무들, 손익을 따져 잘 자라지 못하는 가지의 양분을 끊어버리는 나무까지.

나무가 지닌 이야기를 알게 되니 나무가 사람과 참 닮아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과 성격으로 소개되곤 하지만 그것이 나를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하죠. 때로는 스스로를 소개할 때도 특정 인상을 주기 위해 이야기를 고르기도 합니다. 이 역시 내가 생각하는 나와는 거리가 있는 경우가 있지요. 문득 나무들은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 마음에 들지, 스스로 소개한다면 어떤 이야기들을 할지, 엉뚱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나무야

역시커피; 나의 감정에 몰입하는 시간

여러분은 감정을 어떻게 기록하시나요? 저는 일상에서는 감정을 흘려보내기에 급급하지만, 몰입의 날에는 제가 느끼는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홍릉숲 해설이 끝난 뒤 잠시 쉴 겸 전날 찾아둔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레트로한 외관과 맛있는 커피, 점심시간 커피를 찾는 이들로 북적이던 내부까지, 제가 생각하는 청량리의 이미지와 어쩐지 닮아있어 더 기억에 남는 공간이었습니다. 모카포트로 내린 라떼는 온화하고 고소한 맛을 내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문밖으로 보이는 풍경이었습니다. 늘 버스를 타고 지나다녔는데, 한 뼘 멀리서 유리문을 통해 본 거리는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예뻤습니다. 푸릇한 나무, 청청한 하늘, 그 사이를 바쁘게 달리는 차들까지, 내가 속해있지 않은 누군가의 일상은 고요하고 그림 같아 보였습니다.

ⓒ나무야

영휘원과 숭인원; 역사 속 이야기에 몰입하는 시간

영휘원과 숭인원으로 걸어가며 담벼락을 따라 난 길이 인상적이어서 잠시 멈춰 섰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길을 보며, 담벼락 안쪽에서 보는 바깥의 풍경은 어떨지 궁금해졌습니다.

영휘원은 고종황제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원이고, 숭인원은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첫째 아들인 이진 원손의 원입니다. 영휘원과 숭인원은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지요. 장소의 성격을 고려해 조금 더 차분해진 마음으로 영휘원과 숭인원 입구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이곳에 한 시간가량 머물며 세 바퀴를 돌아보았습니다. 처음 한 바퀴는 설명과 함께 구조물을 살폈고, 두 번째는 이곳과 관련된 역사 속 인물들을 생각했고, 마지막은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곳은 영휘원으로 향하는 길목이었습니다. 우거진 나무 속으로 영휘원이 살짝 보이다가, 조금 더 걸으니 넓게 펼쳐진 하늘과 함께 영휘원이 온전히 보였습니다. 측면에서 보았던 영휘원의 모습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묘와 그 뒤의 울창한 소나무들을 보며, 진명여학교와 명신(숙명)여학교를 설립한 순헌황귀비 엄씨의 이야기, 그와 이진 원손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떠올려볼 수 있었습니다.

입구로 나가는 길, 담벼락 너머로 청량리역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뒤를 돌아 둘러보니 이곳으로 잠시 휴식을 취하러 온 시민들도 보였습니다. 공간이 주는 무게감은 간직하면서 누군가에게는 일상을 벗어난 공간으로,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공간이 되어주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나무야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

저는 정릉천에서 회기동으로 이어지는 거리를 참 좋아합니다. 인도를 따라 큰 가로수가 있어 도심에서 벗어난 느낌을 주면서도, 도로의 차를 보면 일상에서 너무 벗어나 있지 않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몰입의 날을 마무리하며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 거리를 걸어보았습니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났다가 돌아올 때 도심의 경계에 있는 듯한 이 거리만큼 적합한 길이 없습니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홍릉숲으로 나설 때보다 한층 더 기분 좋고, 달리 설명할 길은 없지만 무언가 꽉 채워진 느낌으로 길을 걸어왔습니다.

ⓒ나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