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동대문) 진돌 | ‘선량한’ 동네, 동대문에서 쉼을 발견하다

2025-10-13

동대문 로컬 잇기

from 진돌ㅣ‘선량한’ 동네, 동대문에서 쉼을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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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동네, 동대문에서 쉼을 발견하다.

 

당신에게 '동대문'은 어떤 이미지인가요? 동대문이라는 지역에 대해 잘 알기 전, 저는 이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동대문에 가려면 지하철 1호선을 타야 하는데 그게 썩 유쾌하지 않았거든요. 청량리 일대가 이전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발전했다는 뉴스 기사를 볼 때에도, 인스타그램 피드가 경동시장 스타벅스로 가득 차던 때에도 제 머릿속의 동대문은 복잡하고 정비되지 않은 옛 동네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저는 운명처럼 동대문구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전에 깊게 각인된 이미지 탓인지 회사 생활의 고단함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동대문에 정을 붙이기 더욱 힘든 상황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글을 쓰는 지금, 제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들 중 무려 두 곳이 동대문구에 있습니다. 두 장소 덕분에 저는 동대문을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의 글에서 장소에 대한 제 기억을 공유해 보려고 합니다. 당신이 혹시라도 과거의 저처럼 동대문을 차가운 눈으로 보고 있는 분이라면 더더욱 환영합니다.

 

모든 것이 작은 곳에서 쉼을 만끽하다 : 장안가온누리 작은도서관

무색무취 회사원으로 1년을 어찌저찌 흘려 보내고 2년째 출근하던 어느 날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왜인지 그날은 점심 시간에 다른 곳을 가보고 싶었습니다. 늘 가던 근처 백반집 말고 더 멀리, 회사와 격리됐다고 느낄만큼 먼 곳으로요. 따릉이를 힘차게 밟다보니 작은 공원이 보였고 그 안에 더 작은 공간이 있어서 들어가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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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돌

사방에 꽂힌 책들과 햇빛이 들어오는 작은 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전체적인 공간은 작았지만 다양한 취향을 반영한 책들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빈 곳 없이 꽉 채워진 책장을 보며 방문자를 환영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마음을 ‘비록 규모는 작지만 너를 위하는 마음만은 화려한 공간 못지 않으니 즐기다 가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사람이 너무 많거나 좁은 공간은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은도서관의 문을 연 순간 많아 봐야 열 명이 못 앉을 이곳에서 책을 읽는 건 힘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좋아한는 작가님의 신작을 마주하니 앉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만 보고 얼른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공원에서 신나게 뛰며 놀고 있는 아이들 소리가 들렸습니다. 요근래 몇 년간 들을 일이 거의 없던 그 소리가 반가웠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놀이터에서 하루 일과를 끝내던 어린 날의 제 모습도 떠올렸습니다. 책을 읽다 상념에 빠졌다를 반복하다보니 회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도서관을 떠나는 발걸음이 꽤나 무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전까지 소위 '힐링'이란 걸 여러번 시도 했었는데 결과는 대부분 만족스럽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도서관을 나오는 순간 이 공간에서 보낸 시간을 '힐링'말고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싶더군요. 물론 서울엔 수많은 작은 도서관이 있지만, 놀이터 안에서, 나무들 아래에서 그곳으로 들어가면 하나의 그림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주는 공간은 쉽게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당신이 동대문에 올 일이 있다면 속는 셈 치고 작은도서관에 들러 보세요. 좋은 공간에서 느끼는 기쁨이 어떤 건지 조금은 알게 될 겁니다.

 

숲과 책,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무해한 단어 : 배봉산과 배봉산근린공원 숲속 도서관

저는 사람의 장점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의 어떤 단점이 제게 상처로 다가올 때 그가 지닌 장점을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달래곤 하기 때문이죠. 지금까지 장점만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장점뿐인 단어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숲과 책입니다. 동대문 배봉산근린공원 숲속 도서관은 이 사랑스러운 두 단어가 잘 어우러진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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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돌

언뜻 보면 큰 동네 뒷산처럼 보이는 배봉산은 과거 사도세자의 묘소인 영우원이 있던 곳입니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매일 궁궐에서 묘소를 향해 절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에 봉우리를 향해 절을 한다는 뜻의 ‘배봉(拜峰)’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배봉산의 초입에 숲속 도서관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을 처음 간 날 동네 주민들이 아침 일찍부터 와서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배봉산 초입까지 가는 길은 경사가 꽤 있는 편이었는데도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도서관을 이용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도서관 내부에 있는 통창으로 보이는 풀과 나무를 보다 보니 마음이 진정되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쯤되니 마을 도서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책이 아닌 쉼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도서관 오는 길에 언덕을 오르며 많은 땀을 흘려서인지 공간 안에 들어섰을 때는 케케묵은 과거의 일을 곱씹기엔 에너지가 많이 남아있질 않았습니다. 어제까지의 스트레스는 잊고 오랜만에 제게 스며든 평화를 만끽한 후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앉을 자리를 탐색하는데 자리마다 배치된 독서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햇빛을 적당히 가리되 나무 줄기가 보이는 좌석도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이용객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발견할 때마다 이 공간이 점점 더 좋아졌습니다. 저는 산을 오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동대문과 저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화려하고 트렌디한 장소를 기대하셨다면 조금 실망하셨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의외로 소박하고 평범한, 그러나 질리지 않는 어떤 선량한 장소들 덕분에 그 지역을 사랑하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일과 사람에 지쳐 서울의 공기를 버거워 하던 제가 결국은 회사가 있는 동네에 주말에도 놀러 올만큼 동대문과 서울을 사랑하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제 글을 읽은 당신도 별 기대 없이 발 들인 바로 그 곳에서 동대문을 사랑하게 되길, 서울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길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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