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구리) 하코ㅣ경주와 서울, 그리고 구리에서의 가을

2025-09-09

로컬 에디터 6기

from 하코ㅣ경주와 서울, 그리고 구리에서의 가을



내가 살고 있는 구리의 계절감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읽고 있던 책 류자키 쇼코의 <크리에이티브 점프>에서 영감을 얻었다. '지역 분위기를 해독할 때도 "이 지역의 특색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막연한 대답밖에 할 수 없습니다.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고 다른 지역과 비교해보면 그 지역 고유의 장점과 특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호텔 96년생의 일본 호텔 브랜드 CEO가 썼다. 그녀는 일본 각 지역의 특색을 조심스럽지만 과감하게 해석한다. 개성있는 인사이트를 호텔이라는 물질 공간에서 어떻게 감각으로 재현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구리에서의 가을을 말하자니 거리를 걸을 때 보았던 낙엽이 제일 떠올랐다. 낙엽은 전국 어디에나 있기에 '구리다운'것이 아니다. 좀 더 시간과 공간의 간격을 넓게 잡았다. 나는 경주에서 19년을 살았고, 서울에서 10년을 살았다. 그리고 경기도 구리에서  3년차다.  가을마다 각 지역에서 경험했던 뜻깊은 순간들을 되짚어보았다.  




#2020년 경주에서의 가을

자전거를 타고 불국사를 향해 질주하며 본 황홀한 황금빛 논 ⓒ하코


운이 좋게도 나는 ‘고향’이 있다. 고향이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몸담고 있는 일상이 지루할 때 ‘언제가도 익숙한 또다른 제 2의 집’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는 명절이라고 부르는 기간에  ‘마땅히 가야하는 공간’이 있다는 뜻도 된다. 모든 것은 장단점이 있다. 언제든지 떠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안식처가 될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 온전한 뿌리내리지 못하고 몸과 마음이 둥둥 떠다니는 부유감을 만들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안정적인 무게중심을 잡고 고향을 대하고 있다. 제 2의 집은 정신적 뿌리이다. 발을 딛고 서있는 현재와는 분명히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라는 든든함과 긍지를 잃지 않게 한다. 



2020년 어김없이 추석을 맞아 경주를 갔다. 당시 나는 서울에서 자전거를 매우 즐겨탔다. 서울에서는 지도 앱을 보지 않으면 길을 잃고만다. 경주는 나에게 매우 익숙한 도시다. 발길 닿는 대로 페달을 밟아도 불안하지 않다. 관광도시인 경주는 자전거 대여업체가 굉장히 많다. 자전거를 한 대 빌려 혼자서 경주를 쏘다녔다. 경주 고속버스터미널이 있는 노서동에서 출발하여 첨성대, 불국사, 동궁과월지를 지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경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신분을 숨기고 관광객인척 돌아다니는 것은 꽤나 재밌다. 특정하고 간 것은 아니었는데, 불구사를 향해 마구 달리던 중 마주친 황금빛 논은 자전거를 세우게 만들었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겸손한 벼들과 그 뒤로 보이는 평화로운 마을 모습. 산과 노을진 하늘의 조화로움은 말을 잃게 만들었다. 분명 드넓은 토지와 집, 산과 하늘 모든 것이 내 눈앞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눈과 마음이 너무 편안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부지런했던 과거로부터 인정받고 다가오는 겨울과 봄에 대한 의지를 다진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경주의 가을 풍경을 온몸을 열고 맞이했다. 가을바람이 '잘했다, 수고했다' 격려하며 내 등을 밀어주었다. 나는 여느때보다 빠른 속도로 자전거를 쌩쌩 달렸다.


경주의 가을은 끊임없는 정서적 위로와 용기를 주는 곳이다. 


#2022년 서울에서의 가을

미술을 감상하는 나의 어머니 ⓒ하코


서울은 정말이지, 문화예술의 도시다. 어느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어도 미술관이 있고, 전시장이 있으며, 공연이 펼쳐진다. 거창한 미술관을 가지 않아도 세련된 취향과 정성이 가득 담긴 카페나 옷가게, 음식점 또는 매력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가게들을 끊임없이 만날 수 있다. 이런 도시에게 어떻게 젊은이들이 이끌리지 않겠는가.  언젠가부터 추석마다 어머니는 경주에서 올라오셔서 서울의 미술관 투어를  한다. 그리고 같이 경주로 내려가 명절을 마무리한다. 2022년도에 우린 키아프프리즈 서울아트페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DDP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을 구경했다. 명절에 하는 서울 미술관 투어는 아주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왜냐면 평소같으면 2시간이 걸릴 서울의 꽉 막힌 도로가 뻥~ 뚫려서 30분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창문을 열고 평소보단 맑아진 서울 공기를 마시며 달려본다. 에어컨보다 시원해진 가을바람을 만끽할 때다. 가을이 왔음을 알아차리는 방법 중 하나는 습하고 무거운 여름 공기가 가벼워졌을 때다. 겨울처럼 너무 가볍거나 날카롭지도 않다. 시원하지만 포근하다. 온몸을 감싸는 기분좋은 바람과 곁에 있는 엄마, 그리고 수많은 예술작품들. 가을에 취하고 행복에 취하기 딱 좋다. 


서울에서의 가을은 문화예술의 도시이다.  예술작품을 보며 엄마와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 전혀 다른 상상과 느낌을 공유한다. 예술이 아니었다면 엄마와 좀처럼 하기 어려울 수 있는 색다른 주제나 기억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익숙한 상대에게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2024년 구리에서의 가을


구리에서의 세번째 가을을 함께하고 있다. 가장 와닿은 것은 나무의 변화이다. 흩날리는 벚꽃, 푸르른 녹음, 화려하지만 쓸쓸한 낙엽, 그리고 마지막 잎새를 지닌 겨울나뭇가지.  매일 조금씩 변화하는 출퇴근길의 동네모습을 보며 일년을 가늠한다. 경주와 서울에서 살 때는 그저 단풍을 구경하는것만으로도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스며드는거라는걸 몰랐다. 뭔가 더 대단하고 사회적인 일을 해야만 구성원이 되는거라고 착각했다. 집 근처에 있는 왕숙천에서 운동을 하며 가을바람을 마신다. 구리시장에서 제철과일과 나물을 구경한다. 인창 도서관으로 가는길 단풍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을 사부작사부작 밟는다. 이 모든 사소한 행위들이 구리에서만 할 수 있는 구리 로컬러의 행위인것인것을.  이번 가을에는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보이는 일상을 집중해서 해봐야겠다. 


경주는 위로를, 서울은 새로운 영감을 주는 도시가 된 것처럼 구리도 어느순간 어떤 상징을 지닌 도시로 내게 다가올 것이다. 아기들은 잠이 드는 느낌을 낯설어하여 잠투정을 한다고 한다. 나에게 구리는 세 번째 도시이니 이제 새로운 도시가 내게 스며드는 순간을 묵묵히 기다릴 줄도 안다. 구리에서 30대를 맞이하였다. 구리는 여유롭게 기다리는 태도에 대해 알려주는 도시가 될 것이다. 아직 각 지역이 내게 준 의미에 대해 소화할 만큼 나이가 영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함께한 지역들이 주는 위로와 용기, 영감으로 나는 햇빛을 듬뿍 머금은 가을의 과일처럼 분명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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