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 6기

from 으로도ㅣ생동하는 연천, 여름이었다

“여름이었다.”

이 말이 끝에 오면 모든 말이 아름다워진다며 한동안 유행하던 밈이 있습니다. 여름이 대체 뭐길래, 그 한 단어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걸까요? 오늘은 그 의미를 알게 해준 연천의 자연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 고대산, 표범 폭포와 약수터

어릴 적, 토요일 아침이면 늘 아버지를 따라 고대산에 물을 뜨러 가곤 했습니다. 남들은 트레킹 복장을 단단히 챙기고 오르는 산이었지만, 저희 가족은 “산에 가면 오히려 더러워진다”면서 평소엔 잘 신지도 않던 낡은 운동화를 꺼내 신곤 했어요. 그 차림새를 보고 몇몇 등산객들이 저희를 걱정해 주던 기억이 납니다.

올여름, 그 시원한 물을 다시 마시고 싶어 혼자 고대산을 찾았습니다. 어른이 된 뒤로는 거의 가지 않았는데도, 발길이 자연스레 길을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했어요. 약수터는 제3등산로를 따라 표범 폭포로 가는 길에 있는데, 덕분에 물을 뜨러 갈 때면 늘 폭포를 들렀다 내려오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폭포부터 향했어요.

*알아보니 제 3등산로는 1,2,3코스 중에서도 가장 가파른 코스였네요. 그래서 더 등산객들이 신기하게 바라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대산 등산로 지도 ⓒ연천군청

절벽 표면에 표범과 같은 무늬가 있어 이름 붙여진 표범 폭포는 기억보다 훨씬 아담했어요. 절벽 군데군데 솟아난 이끼들 때문에 웅장하기보다는 오히려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키가 훨씬 작았던 어린 시절의 눈에 비친 모습이 지금껏 크게 각인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절벽을 따라 흐르는 시원한 물줄기 아래, 작은 웅덩이에는 올챙이와 도롱뇽이 살고 있었고, 수피를 뒤집어쓴 듯한 신기한 벌레도 보였습니다. 그 물속 세상이 너무나 평화롭고 소중하게 느껴져서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내려왔어요.

고대산의 겨울과 여름 ⓒ연천군 공식 블로그 / 으로도

🍒 신탄리집의 빨간 맛, 앵두

저희 집엔 자연이라면 뭐든 잘 키워내는 마법사가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인데요. 마당 앞뒤로 텃밭을 가꾸시며 파, 가지, 오이, 상추, 감자, 고추까지 안 키우는 채소가 없을 정도예요.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던 건 텃밭 한켠의 앵두나무였습니다.

앵두(Nanking cherry)는 서양의 체리와 달리 과육이 물렁하고, 앞니로 살짝만 눌러도 '톡!' 하고 터질 만큼 수분이 가득합니다. 맛은 체리보다 덜 달지만 훨씬 상큼하고, 수분감만큼이나 투명하고 청량한 느낌을 줍니다. 여름 비가 내리기 전이면 저희 집은 앵두를 따서 잼을 만들거나 청을 담가 두었다가 계절 내내 아껴 먹곤 합니다. 이번에 고대산을 다녀온 날에도, 미리 담가둔 앵두청을 탄산수에 섞어 에이드로 마셨어요. 탄산과 함께 차오르는 앵두의 투명한 붉은 맛은 매년 여름을 기다리게 하는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직접 담근 청으로 만든 앵두에이드 ⓒ으로도

새콤하고 톡톡 터지는 앵두, 무서운 이름과 달리 보드라운 이끼로 덮인 절벽, 그 아래에서 눈길을 붙잡는 귀여운 동물들까지. 이 모든 것은 연천이 제게 알려준 여름의 모습입니다. 덕분에 그 계절을 직접 만지고 맛보면서 온전히 느낄 수 있었어요. 이런 의미에서 글의 서두에 등장한 밈을 제 나름대로 재해석해 본다면,

“생동하는 연천, 여름이었다"

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막연히 계절 이름만 떠올리면 흔히 생각나는 것들이 있죠. 하지만 특정 장소를 함께 기억하면, 그 시기를 정의할 수 있는 새로운 단어들이 떠오르는 듯합니다. "___, 여름이었다."의 빈칸을 채웠던 것처럼, 가을에서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이 되기까지, 앞으로 다가올 계절의 공백은 어떤 단어들로 채울 수 있을지 기대해봅니다. 바뀌는 계절의 바람을 천천히 맞이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