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에디터 5기

from 까만콩ㅣ당신의 케렌시아는 어디입니까

김 차장, 자네의 케렌시아는 어디인가?

주문한 차가 나오자마자 상무님께서 하신 질문이다. 티스푼으로 휘휘 저으며 '케렌시아'라는 단어를 온갖 기억 회로 속에서 더듬어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찻잔 속 모과 덩어리뿐이었다.

'케렌시아(Querencia)'는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를 뜻한다. 투우 경기장에서 소가 숨을 고르며 쉬는 장소를 말한다. 소는 위협을 피할 수 있는 케렌시아를 찾아내고 또 그곳에서 안정을 찾는다고 한다. 

몇 년이 흘렀지만 그날이 지워지지 않은 이유는 어떠한 질문 하나가 어떠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지 온몸으로 실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을 사랑했지만 일에 쫓기고 있었고, 동료들을 챙겨야 했지만 정작 나를 돌볼 줄은 몰랐다. 아파도 회사에 나가야 했고, 그렇게 아끼고 모은 연차로 일 년에 한두 번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나는 여행이 나에게는 유일한 낙이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는 그러한 긴급 처방도 통하지 않았고, 그렇게 떠나봤자 무슨 소용인가, 다녀와서 하루 이틀이면 다시 소진될 것을. 이라는 냉소에 이르고야 말았다. 상무님의 점심시간 호출은 2개월의 휴직을 앞두고 있었을 때이다. 

주말엔 음악도서관으로

음악도서관 전경 ㅣ 1층 퍼블릭스테이지  ⓒ까만콩

집은 나에게 여관방 같은 곳이다. 호텔도 호스텔도 아닌 여관방이라니. 집에 도착하면 밤이고, 집을 나서는 시간도 어스름한 새벽이다. 한 몸 잠시 뉠 그런 공간. 십수 년째 장기 렌트 중인 여관방 정도라고 해두는 것이 어울리겠다. 그러니 동네는 그다지 의미가 없을 수밖에.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 음악도서관이 생겼다. 지지부진하던 공사가 언제 마무리된 것일까. 삽과 포대 같은 것들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건물 옆으로 막 심은 나무와 풀들이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외부에서 보면 응? 이런 곳에 도서관이? 그것도 음악도서관이? 아파트 옆 작은 공원 한 가운데에 있으니까 좀 생뚱맞은 구석이 있다. 게다가 규모는 아담하기 그지없다. 들어가면 다시 한번 놀란다. 알찬 콘텐츠와 공간 구성 때문이다. 겉바속촉같은 느낌이랄까. 책뿐만 아니라 CD, LP, 악보 등 음악을 직접 들어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통창으로 둘러싼 1층 한켠에서는 음악 행사가 비정기적으로 열리고, 3층 뮤직홀에서는 시간대별로 클래식 음악이나 뮤직비디오, 음악 다큐멘터리 등을 상영해 준다. 방대한 규모와 희귀 콘텐츠로 유명한 H카드 뮤직라이브러리만큼은 아니더라도 공공도서관으로써 꽤 대담한 시도이다.

무릇 도서관이라 함은 책을 꺼내거나 책장을 넘기는 소리, 간혹 들리는 발자국 소리 정도가 대부분인데 이곳 음악도서관에서는 책장과 복도 사이로 음악이 흐른다. 도서관에 들어서는 사람들에게는 환영의 음악으로, 책장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더 편안하게 다가설 수 있는 음악으로, 책에 빠져든 사람들에게는 집중의 음악으로 다가간다. 사람들은 그렇게 음악도서관에서 편안하게 유영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리고 그 사이를 순례자처럼 서성이는 내가 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숨을 고르고, 책을 고르는 음악도서관 순례자 말이다.

소박하고도 사치스러운

2층 넘버원 ㅣ  3층 넘버투 케렌시아  ⓒ까만콩 

나의 케렌시아는 2층 창가를 마주하고 놓인 세 번째 의자다. 일인용 의자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놓여있어서 옆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아무도 모르는) 나의 전용석이다. 공공에서 운영하는 공간일지라도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 위해 심리적 거리 따위 배려하지 않는 문화에 익숙해진, 이 좁디좁은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배치는 귀하디 귀하다. 이 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창문 너머 익숙한 동네 공원의 풍경도 쓸데없는 생각을 떠올리다가 말기에 더없이 좋다.

이곳을 누가 점령하고 있다면? 그럼 지체 없이 3층 뮤직홀로 발걸음을 옮긴다. 계단형 좌석 맨 윗줄 왼편 구석의 소파가 나의 넘버투 케렌시아다. 책을 보다가 고개가 아프면 잠시 눈을 떼 화면을 응시하기도 하고 멍 때리기를 하거나 가끔은 졸기도 하는. 이쯤 되면 책은 핑계라는 것을 짐작했을 터. 

음악도서관에서 주말의 한가로운 사치를 줄기차게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주말 출장이 없는 주간에는 그저 누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를 마음속으로 수십 번 외치다가 그런 자신이 한심하다 못해 미워질 때쯤 겨우 몸을 일으켜 옷을 주섬주섬 입고 음악도서관으로 향한다. 내 걸음으로 7분이면 닿는 곳에 나만의 케렌시아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큰 축복이다. 여관방이 있는 곳 정도로만 여겼던 동네가 조금 살만한 곳이 된 것 또한 음악도서관 덕분이다. 

음악이 흐르는 음악도서관, 그 곁에는 중랑천이 흐른다. 날이 좋을 때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들고 중랑천으로 향해도 좋다. 비스듬한 햇살 사이로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오후 4-5시경, 벤치에 앉아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보다가 때때로 책을 응시하다가 그렇게 시간을 소비한다. 그럼 어느 순간 몸속 어딘가에 붙어있던 긴장이라는 녀석이 쑥 빠져나가고, 그 사이 가로등이 하나 둘 제 몸을 밝힐 것이다. 🔍

3층 CD, LP 콜렉션 ㅣ 1층 사서컬렉션(CD소개)   ⓒ까만콩

editor’s 📮___

의정부에는 음악도서관 외에도 정보도서관, 과학도서관, 미술도서관, 영어도서관이 있다. 이 중 정보도서관은 이 글을 작성하는 시점에 임시 휴관 중이다. (2025년 1월 2일부터 11월 30일까지 리모델링 진행)

📎 의정부도서관 통합페이지 : www.uilib.go.kr

음악도서관 입구  ⓒ까만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