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로컬 잇기
from 차리ㅣ제기동에서는 모두 한 뼘 거리가 됩니다

제기동에선
모두
한 뼘 거리가 됩니다
➰
몇 번을 만나도 어색한 친구가 있는가 하면, 처음인데도 편안한 친구가 있죠. 공간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친구 같은 동네가 있어요. 바로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제기동입니다. 잠깐 머무는 이에게도 한 뼘 옆자리를 내어주는 이곳. 제기동의 구석구석을 소개해 드릴게요.
1. 사람과 사람 사이, 한 뼘
경동시장

ⓒ차리
시장을 좋아하나요? 제기동의 절반 가까이는 시장으로 이뤄져 있어요. 서울 전통시장 중 가장 크다는 경동시장도 이곳에 있답니다.
저는 시장 가는 걸 꽤 좋아해요. 일단 그 에너지가 좋아요. 좋은 물건을 싸게 구할 수도 있고요. 가게마다 다른 물건을 비교해 보는 것도 묘미죠. 물론 시장을 절대 안 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시끄럽고, 이리저리 치이고, 카트 없이 양손에 짐을 들어야 하니까요. 다소 불편한 건 사실이에요.


ⓒ차리
그럼에도 자꾸 마음이 가는 곳은 시장이에요. 왜 그럴까요? 아마도, 그 불편함이 만든 애정 때문일 거예요. 내 영역을 침범당하는 건 분명 불쾌할 수 있지만, 우리는 가까이 있는 것에 친근감을 느끼게 되기도 해요. 물리적인 거리가 주는 묘한 유대감이 있죠.
어쩌면 시장은 축제와도 비슷해요. 북적이고 소란스러워서 전혀 쾌적하진 않지만, 그 안의 에너지와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우리를 공간의 일부로 만들어 버려요. 그 활기와 충돌이 어느새 애정으로 바뀌는 거죠.
시장에선 온 사방의 사람, 소리, 글자가 나를 막 스쳐 가요. 정신이 쏙 빠지게 복잡하지만, 왠지 싫지는 않아요. 이 불편함은 어느새 다채로운 자극으로 변하고, 그 자극은 생기를 북돋아요.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금세 시장 안에 녹아들어요.

ⓒ차리
토요일 오후 4시, 경동시장은 늘 그렇듯 사람이 가득해요. 가게 주인이 과일을 그득히 쌓아두고 싱싱한 물건이라며 귀 터지게 선전하니 손님들도 왁자지껄해요. '각종 카드 환영합니다' '자.연.산. 있어요' 박스 조각에 매직으로 벅벅 쓴 투박한 광고물마저 시끄럽죠.
구경하던 사이, 찜 해둔 토마토를 옆의 할머니에게 뺏겼어요. 가게 주인은 옳다구나 '토마토 한 다라이 3천 원이요~' 더 크게 얘기하고요. 빨리 다른 걸 고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이거 가게 주인 의도에 시원하게 걸린 것 같아요. 시장은 이렇게 복작복작. 밀고 당기는 긴장감이 팽팽해요.

ⓒ차리
나가는 길도 사람으로 막혀요. 시장 밖 노점상 거리까지 겨우 벗어나면 비로소 주변이 고요해져요. 그런데 내 안엔 여전히 시장의 생동감이 가득 차 있어요. 양손 묵직한 짐 마저 충만하게 느껴집니다. 분명 불편했던 것 같은데, 왜 또 가고 싶을까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시장에서 나를 스쳐 간 것들에 알 수 없는 애정이 생기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네요.
2. 집과 집 사이, 한 뼘
정릉천 맞벽 주택, 골목 주택

ⓒ차리
붉은 벽돌 양옥집이 정겹게 들어선 제기동 골목에는 오래된 주택들이 모여 있어요. 집 사이엔 한 뼘 정도 좁은 틈만 있을 뿐, 줄줄이 이어져 있죠. 원하든 원치 않든 많은 이웃이 함께 살아갈 이곳. 이웃이란 인연은 내 뜻대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게 새삼 특별하게 다가와요.
주택가 골목은 무척 조용하고 한적해요. 옅은 빗소리에 가끔 새 지저귀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죠. 시장과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 아담한 집들이 가까이 모여있는 풍경엔 시장 같은 다정함이 느껴져요. 북적이지 않아도 제기동만의 따뜻한 온기가 차분히 배어있어요.

ⓒ차리
색은 비슷해 보여도 똑같은 집은 단 하나도 없어요. 창, 지붕, 대문의 조합이 모두 다르죠. 집 앞에 내둔 화분과 자전거에 집주인의 취향이 슬쩍 보이기도 해요. 정형화된 아파트에서는 찾기 어려운 모습이죠. 이런 개성 있는 집들이 골목을 꺾을 때마다 보이니, 산책이 지루할 수가 없습니다.

ⓒ차리
제기동의 중심엔 정릉천이 곧게 흐르고 있어요. 그리고 그 옆엔, 한 뼘 틈조차 없이 딱 붙은 주택들이 길게 이어지죠. 과거 경춘선 열차가 지나던 자리인데, 폐선된 뒤 그 자리에 맞벽 주택이 들어섰다고 해요. 골목에서 본 주택보다 건물 가로 길이가 훨씬 길고 색도 다채로워요. 그런데도 높이는 고만고만한 게 사이가 좋아 보입니다.
맞벽 주택의 수평적인 지붕 선은 정릉천과 함께 제기동만의 고요하고 평온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어떠한 위계도 긴장감도 없어요. 이 느긋한 수평선을 보고 있자면 일상의 치열함은 잠시 멀어져요. 모두 남보다 높이 올라가려 애쓰는데,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주는 듯하죠. 그래서 제기동에 오면 달려가던 발걸음을 잠깐 멈추고, 소화를 시키는 편안함이 느껴지나 봅니다.
3. 시간과 시간 사이, 한 뼘
선농단, 제기동성당

ⓒ차리
제기동 어디든 과거의 시간이 서려 있지만, 유난히 깊은 이야기가 담긴 장소들이 있어요. 바로 선농단이에요. 조선시대 때 왕이 풍년을 기원하며 직접 제를 올렸던 제사 터죠. 농사의 신인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지낸 뒤엔 왕이 친히 쟁기로 밭을 가는 시범도 보였다고 해요.

ⓒ차리
단단한 돌계단을 몇 걸음 오르면 제단처럼 드넓은 터가 펼쳐져요. 길게 솟은 땅 위에 파란 풀이 무성해요. 찬찬히 둘러보다 보니 선농단 옆 빌라 3층과 눈높이가 얼추 맞아요. 제를 드리던 당시엔 모든 게 아래에 있어 오직 하늘만 우러러봤겠지요. 제사에 대한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계단을 올라 먼 곳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자연스레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차리
또 다른 곳은 제기동 성당이에요. 지금은 성당인 곳이 과거에 잡신을 모시던 제사 터였다고 해요. 그래서 성당 건립이 결정됐을 때, 잡신이 노할까 봐 주민들이 크게 반대했었다고 해요.
이곳 역시 신성한 장소답게 계단을 올라야 닿을 수 있어요. 1950년대 석조 성당의 전형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성당엔, 갓을 쓴 김대건 신부의 석상이 조용히 서 있어요. 한 바퀴 돌아보니, 빗소리에 묻힌 미사 음악이 성당 밖까지 은은하게 들려옵니다.

ⓒ차리
두 공간 모두 잘 보존된 과거의 시간이 고요히 머물러 있어요. 특히 제사와 기도의 자리를 지켜온 장소들이기에 그 안에 담긴 염원도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옛터를 걷다 보면, 수십 년의 시간이 한 뼘 앞으로 성큼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이곳에 담겨있는 긴 세월과 현재의 시간이 맞닿을 때, 지금 이 순간 또한 세월이 되어 흘러가고 있음을 체감하게 되죠. 지금도 제기동에 쌓이고 있는 누군가의 발자국이 먼 훗날 누군가에게 조용히 전해지길 바라봅니다.
➰
'한 뼘'으로 나타나는 제기동만의 친근함과 포용성은 오랜 세월 동안 이곳을 지나간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자취를 멋스럽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리고 제기동을 들르는 누구에게나 그 흔적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고요. 앞으로의 제기동엔 어떤 것이 남고 어떤 것이 변할까요? 모습은 달라지더라도, 이 '한 뼘'은 제기동의 소중한 유산으로 오래오래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 제기동 탐방일
2025. 07. 05.
2025. 07. 19.
동대문 로컬 잇기
from 차리ㅣ제기동에서는 모두 한 뼘 거리가 됩니다
제기동에선
모두
한 뼘 거리가 됩니다
➰
몇 번을 만나도 어색한 친구가 있는가 하면, 처음인데도 편안한 친구가 있죠. 공간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친구 같은 동네가 있어요. 바로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제기동입니다. 잠깐 머무는 이에게도 한 뼘 옆자리를 내어주는 이곳. 제기동의 구석구석을 소개해 드릴게요.
1. 사람과 사람 사이, 한 뼘
경동시장
ⓒ차리
시장을 좋아하나요? 제기동의 절반 가까이는 시장으로 이뤄져 있어요. 서울 전통시장 중 가장 크다는 경동시장도 이곳에 있답니다.
저는 시장 가는 걸 꽤 좋아해요. 일단 그 에너지가 좋아요. 좋은 물건을 싸게 구할 수도 있고요. 가게마다 다른 물건을 비교해 보는 것도 묘미죠. 물론 시장을 절대 안 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시끄럽고, 이리저리 치이고, 카트 없이 양손에 짐을 들어야 하니까요. 다소 불편한 건 사실이에요.
ⓒ차리
그럼에도 자꾸 마음이 가는 곳은 시장이에요. 왜 그럴까요? 아마도, 그 불편함이 만든 애정 때문일 거예요. 내 영역을 침범당하는 건 분명 불쾌할 수 있지만, 우리는 가까이 있는 것에 친근감을 느끼게 되기도 해요. 물리적인 거리가 주는 묘한 유대감이 있죠.
어쩌면 시장은 축제와도 비슷해요. 북적이고 소란스러워서 전혀 쾌적하진 않지만, 그 안의 에너지와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우리를 공간의 일부로 만들어 버려요. 그 활기와 충돌이 어느새 애정으로 바뀌는 거죠.
시장에선 온 사방의 사람, 소리, 글자가 나를 막 스쳐 가요. 정신이 쏙 빠지게 복잡하지만, 왠지 싫지는 않아요. 이 불편함은 어느새 다채로운 자극으로 변하고, 그 자극은 생기를 북돋아요.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금세 시장 안에 녹아들어요.
ⓒ차리
토요일 오후 4시, 경동시장은 늘 그렇듯 사람이 가득해요. 가게 주인이 과일을 그득히 쌓아두고 싱싱한 물건이라며 귀 터지게 선전하니 손님들도 왁자지껄해요. '각종 카드 환영합니다' '자.연.산. 있어요' 박스 조각에 매직으로 벅벅 쓴 투박한 광고물마저 시끄럽죠.
구경하던 사이, 찜 해둔 토마토를 옆의 할머니에게 뺏겼어요. 가게 주인은 옳다구나 '토마토 한 다라이 3천 원이요~' 더 크게 얘기하고요. 빨리 다른 걸 고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이거 가게 주인 의도에 시원하게 걸린 것 같아요. 시장은 이렇게 복작복작. 밀고 당기는 긴장감이 팽팽해요.
ⓒ차리
나가는 길도 사람으로 막혀요. 시장 밖 노점상 거리까지 겨우 벗어나면 비로소 주변이 고요해져요. 그런데 내 안엔 여전히 시장의 생동감이 가득 차 있어요. 양손 묵직한 짐 마저 충만하게 느껴집니다. 분명 불편했던 것 같은데, 왜 또 가고 싶을까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시장에서 나를 스쳐 간 것들에 알 수 없는 애정이 생기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네요.
2. 집과 집 사이, 한 뼘
정릉천 맞벽 주택, 골목 주택
ⓒ차리
붉은 벽돌 양옥집이 정겹게 들어선 제기동 골목에는 오래된 주택들이 모여 있어요. 집 사이엔 한 뼘 정도 좁은 틈만 있을 뿐, 줄줄이 이어져 있죠. 원하든 원치 않든 많은 이웃이 함께 살아갈 이곳. 이웃이란 인연은 내 뜻대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게 새삼 특별하게 다가와요.
주택가 골목은 무척 조용하고 한적해요. 옅은 빗소리에 가끔 새 지저귀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죠. 시장과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 아담한 집들이 가까이 모여있는 풍경엔 시장 같은 다정함이 느껴져요. 북적이지 않아도 제기동만의 따뜻한 온기가 차분히 배어있어요.
ⓒ차리
색은 비슷해 보여도 똑같은 집은 단 하나도 없어요. 창, 지붕, 대문의 조합이 모두 다르죠. 집 앞에 내둔 화분과 자전거에 집주인의 취향이 슬쩍 보이기도 해요. 정형화된 아파트에서는 찾기 어려운 모습이죠. 이런 개성 있는 집들이 골목을 꺾을 때마다 보이니, 산책이 지루할 수가 없습니다.
ⓒ차리
제기동의 중심엔 정릉천이 곧게 흐르고 있어요. 그리고 그 옆엔, 한 뼘 틈조차 없이 딱 붙은 주택들이 길게 이어지죠. 과거 경춘선 열차가 지나던 자리인데, 폐선된 뒤 그 자리에 맞벽 주택이 들어섰다고 해요. 골목에서 본 주택보다 건물 가로 길이가 훨씬 길고 색도 다채로워요. 그런데도 높이는 고만고만한 게 사이가 좋아 보입니다.
맞벽 주택의 수평적인 지붕 선은 정릉천과 함께 제기동만의 고요하고 평온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어떠한 위계도 긴장감도 없어요. 이 느긋한 수평선을 보고 있자면 일상의 치열함은 잠시 멀어져요. 모두 남보다 높이 올라가려 애쓰는데,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주는 듯하죠. 그래서 제기동에 오면 달려가던 발걸음을 잠깐 멈추고, 소화를 시키는 편안함이 느껴지나 봅니다.
3. 시간과 시간 사이, 한 뼘
선농단, 제기동성당
ⓒ차리
제기동 어디든 과거의 시간이 서려 있지만, 유난히 깊은 이야기가 담긴 장소들이 있어요. 바로 선농단이에요. 조선시대 때 왕이 풍년을 기원하며 직접 제를 올렸던 제사 터죠. 농사의 신인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지낸 뒤엔 왕이 친히 쟁기로 밭을 가는 시범도 보였다고 해요.
ⓒ차리
단단한 돌계단을 몇 걸음 오르면 제단처럼 드넓은 터가 펼쳐져요. 길게 솟은 땅 위에 파란 풀이 무성해요. 찬찬히 둘러보다 보니 선농단 옆 빌라 3층과 눈높이가 얼추 맞아요. 제를 드리던 당시엔 모든 게 아래에 있어 오직 하늘만 우러러봤겠지요. 제사에 대한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계단을 올라 먼 곳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자연스레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차리
또 다른 곳은 제기동 성당이에요. 지금은 성당인 곳이 과거에 잡신을 모시던 제사 터였다고 해요. 그래서 성당 건립이 결정됐을 때, 잡신이 노할까 봐 주민들이 크게 반대했었다고 해요.
이곳 역시 신성한 장소답게 계단을 올라야 닿을 수 있어요. 1950년대 석조 성당의 전형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성당엔, 갓을 쓴 김대건 신부의 석상이 조용히 서 있어요. 한 바퀴 돌아보니, 빗소리에 묻힌 미사 음악이 성당 밖까지 은은하게 들려옵니다.
ⓒ차리
두 공간 모두 잘 보존된 과거의 시간이 고요히 머물러 있어요. 특히 제사와 기도의 자리를 지켜온 장소들이기에 그 안에 담긴 염원도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옛터를 걷다 보면, 수십 년의 시간이 한 뼘 앞으로 성큼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이곳에 담겨있는 긴 세월과 현재의 시간이 맞닿을 때, 지금 이 순간 또한 세월이 되어 흘러가고 있음을 체감하게 되죠. 지금도 제기동에 쌓이고 있는 누군가의 발자국이 먼 훗날 누군가에게 조용히 전해지길 바라봅니다.
➰
'한 뼘'으로 나타나는 제기동만의 친근함과 포용성은 오랜 세월 동안 이곳을 지나간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자취를 멋스럽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리고 제기동을 들르는 누구에게나 그 흔적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고요. 앞으로의 제기동엔 어떤 것이 남고 어떤 것이 변할까요? 모습은 달라지더라도, 이 '한 뼘'은 제기동의 소중한 유산으로 오래오래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 제기동 탐방일
2025. 07. 05.
2025. 0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