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오래된 간판을 기록하고 있어요.

2026-03-03

전국│장혜영 (사라지지 않는 간판들)

인터뷰 e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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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드로잉, 카메라, 블로그, 30초 숏폼, 거기에 3D 프린팅, 십자수 세상엔 참 다양한 기록의 방식이 있구나. 방식과 도구는 달라도, 동네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2026년 탐방은 “로컬을 어떻게 기록하나요?”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나만의 시선으로 동네의 장면을 수집하는 이들의 이야기 <로컬 아카이브 : 동네의 수집가들>을 시작해요. 


📸 첫 번째 동네의 수집가 : 장혜영 작가 

『버리지 않는 마음』과 『사라지지 않는 간판들』을 쓴 장혜영 작가를 만났어요. 작가는 우리가 매일 무심코 지나치는 ‘간판’을 오랜 시간 필름 카메라로 담아왔죠. 취미로 시작해 천천히 쌓아온 기록 속에는 동네와 시대의 변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 대상을 이토록 깊고 성실하게 관찰해 온 이는 어떤 사람일까요? 한국에는 매서운 한파가, 뉴질랜드에서는 뜨거운 여름 햇살이 내리쬐던 어느 날. 컴퓨터 화면 너머로 작가님과 마주 앉았습니다. 오래된 한글 간판의 미학과 로컬 아카이빙의 여정. 금세 몰입하게 됐던 그날의 설레는 대화를 전해요.



왜 하필, 오래된 간판이냐고요? 


벗겨진 페인트 자국, 세월에 모서리가 둥글어진 간판들. 옛 간판을 들여다보면 사람만 나이를 먹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아요. 간판도 오랜 시간 참 열심히 일해왔구나 싶죠. 처음부터 ‘간판을 기록해야지’ 마음먹은 건 아니었어요.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자꾸 카메라에 간판을 담고 있더라고요. 다시 생각해 보면, 간판의 아름다움에 먼저 반했던 것 같아요.

옛 간판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있잖아요. 궁금해서 지인들에게 물어봤더니 시각 디자인을 전공한 친구가 답해줬어요. “예전 간판들은 한글 폰트가 개발되기 전이라, 간판 장인들이 서체까지 디자인해서 만들었어.” 그 말을 듣고 거리를 다시 보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수려한 붓글씨부터 한 땀 한 땀 제작한 입체형 간판까지. 만든 이의 개성과 시간이 겹겹이 쌓인 조각품 같았죠. 생계를 넘어 사명감으로 자리를 지킨 장인과 사장님들의 고유한 디자인에 마음이 움직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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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기록은 배민의 을지로체 작업과도 연관이 깊다. 작업을 계기로 2019년 배달의 민족 을지로체 <도시와 글자> 전시장에서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자세히 보면 오랜 간판은 ‘이응(ㅇ)’도 같은 모양이 하나 없어요. 어떤 모음과 만나느냐에 따라 그 크기와 모양이 미묘하게 달라지죠. 그 섬세함을 발견한 뒤로는 풍경도 허투루 보지 않게 됐어요.

요즘은 컴퓨터로 만든 간판이 대부분이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는 장인들이 직접 글자를 빚었어요. 90년대 들어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며 서체가 대중화되었고, 뒤이어 찾아온 외환위기 때는 예산을 아끼기 위해 주인이 직접 글씨를 쓰기도 했죠. 사정은 저마다 달라도 덕분에 하나뿐인 글씨와 이야기가 지금까지 남았습니다. 시대의 풍파를 견디며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온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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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골목의 공업사들은 소문난 한 장인에게 간판 제작을 맡겼다. 골목을 걷다 보면 닮은 붓글씨체가 반복되어 등장한다. 



도시의 문화해설사이자 유물들


거리에서 ‘컴퓨터 세탁’이라는 간판을 본 적 있나요? 종로구 원서동의 럭키컴퓨터세탁 사장님께 여쭤보니 1980년대 자동 세탁기가 등장하면서 생긴 표현이라고 해요. 수동에서 자동화로 넘어가는 변화의 상징이었죠. 당시로선 새로운 기술을 알리려던 최첨단 문구였던 셈이에요. 간판을 파고들수록 이 도시의 문화해설사이자 가치 있는 유물처럼 느껴졌어요.

서울에는 특히 지역 이름이 붙은 가게가 많아요. 겉보기엔 연관 없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다 이유가 있죠. 종로 예지동의 보석가게 ‘보령당’은 사장님의 고향인 충남 보령에서 이름을 따왔어요. 무작정 상경해 어렵던 시절, 고향 사람이 보고 들어올까 싶어 붙인 이름이죠. 실제로 간판을 보고 찾아온 고향 사람과 반가운 재회를 하기도 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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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를 소개하는 안내판이자 도시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간판’ 


동대문 생선구이 골목의 원조 ‘호남집’ 역시 비슷해요. 가게 오픈 자금을 빌려준 고마운 친구 덕분에 서울로 올 수 있었던 사장님. 빚을 갚고 지금의 위치에 새로 가게를 열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고향 이름이었다고 해요.

곳곳에서 지역 이름이 붙은 가게들을 마주하며 서울이 이주민의 도시임을 실감했어요. 음악이나 영화 같은 예술 작품만 사회를 비추는 거울은 아니더라고요. 간판에도 한 사람의 인생과 시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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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전성기였던 아크릴 스카시 간판들*. 간판의 재질과 제작 방식은 만들어진 시기를 유추할 수 있기 때문에 도시의 나이테와 같다.
*아크릴, 고무 판 등을 글자 모양대로 조각해서 입체적으로 만든 간판 종류



한 장 한 장, 느리게 기록하는 필름 카메라


디지털 카메라가 훨씬 빠르고 편리하지만, 저는 필름 카메라를 택했어요. 대학 시절 교수님의 권유로 수동 카메라를 산 게 계기였죠. 영상 전공자라면 감도나 셔터 스피드 같은 기본기를 수동으로 익혀봐야 한다는 조언 덕분이었어요.

필름은 비싸고, 한 롤에 고작 서른 컷 남짓이에요. 그때도 부담이었지만, 지금은 더하죠. (웃음) 그래서 셔터를 누르기까지 더 오래 고민합니다. ‘어디서 찍을까?’, ‘각도를 바꿔볼까?’ 한참을 망설이다 셔터를 누르면, 인화하기도 전에 이미 마음속에 저장되는 기분이 들어요.

뉴질랜드로 이주한 뒤에는 DSLR을 쓰고 있어요. 디지털은 선택지가 너무 많더라고요. 수백 장을 찍고 고르는 과정에서 오히려 기억은 더 희미해졌어요. 반면 필름은 한 롤을 한 달 동안 쓰기도 해요. 현상 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마주하는 순간까지가 기록의 일부였죠.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장면을 고르고 마음에 담으며, 2011년부터 간판을 필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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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쌓인 기록, 『버리지 않는 마음(절판)』과 『사라지지 않는 간판들』. 『사라지지 않는 간판들』은 서점과 지역 도서관에서 만날 수 있다.



좋아해서 오래 했을 뿐인걸요. 


간판이 아름다워 시작한 기록은, 시간이 지나며 사람을 향하게 됐어요. 가게를 지켜온 사장님들의 삶이 궁금해졌고, 그분들께 “당신들의 시간은 그 자체로 정말 의미 있다.” 존경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한국을 떠나기 전 7년, 그리고 뉴질랜드를 오가며 3년. 그렇게 꼬박 10년을 한 대상을 기록했지만 이상하게도 지치지 않았어요. 원동력은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간판을 찍는 행위 자체가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었거든요.

당시 회사 생활은 꽤 고됐어요. 홍보팀에서 주 6일 근무를 밥 먹듯 했죠. 딱 하루 쉬는 날이면 몸을 뉘어야 했지만, 머릿속엔 늘 간판 사진을 찍으러 갈 생각뿐이었어요. 번아웃에서 저를 지켜준 건 도시 곳곳에 숨겨진 보석 같은 간판들이었어요.

친구와의 약속이 있는 날이면 한두 시간을 일찍 도착해 주변을 탐색했어요. 우연히 발견한 가게 앞에서 혼자 기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제 상황을 기꺼이 이해해 준 친구들 덕분에 가능했던 시간이기도 하죠. (친구들아, 정말 고마워!)

출근길 버스 안에서도 거리를 유심히 봤어요. ‘저 간판 예쁜데?’ 싶은 곳은 따로 적어두었다가 휴일에 다시 찾아갔죠. 시간이 쌓이며 겉모습 너머의 이야기가 궁금해졌고 사장님들께 말을 건네며 인터뷰를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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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과 병행하며 휴일엔 골목골목의 간판들을 기록했다.


“뭐 하러 이런 걸 찍어요?”


용기를 내어 질문을 건네던 어느 날, 사장님이 되물으셨어요. “이걸 왜 찍어요?” 사실 저도 망설이고 있었어요. 학생도 아니고, 책을 낼 계획도 없었거든요. 그저 취미로 찍고 있었으니까요. 제게는 신뢰를 줄 만한 명함도 직함도 없었어요. ‘간판을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기엔 스스로 확신이 부족했죠. 그래서 한동안 저 자신에게 계속 물었어요.

나는 왜 이걸 찍지? 이 사진이 정말 필요한가? 질문을 반복하며 기록의 의미를 정리했어요. 그 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래된 간판이 도시가 만들고 시간이 다듬은 예술 작품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기록하고 싶어요.” 처음엔 의아해하던 분들도 제가 느낀 아름다움을 설명하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재개발 구역에서 오래 장사해 온 분들은 자신을 시대에 뒤처진 존재로 느끼기도 하셨거든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니”라던 분들이, 누군가 자신의 시간을 아름답다고 말해주면 조용히 마음을 여는 순간이 있었어요. 거창한 명칭 대신 제가 느낀 의미를 솔직하게 전했을 뿐이에요. 어쩌면 기록은 대상을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먼저 나 자신을 설득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어요.



오늘부터 시작하는 <동네 간판 관찰 가이드>


무엇부터 해야 할지 고민된다면, 우선 이렇게 해보세요. 최대한 가볍게, 언제든 꺼낼 수 있게. 전 일상에서 마주치는 간판을 놓치지 않으려 작은 카메라를 늘 가방에 넣고 다녔어요. 아주 좋은 사양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가벼운 카메라, 작은 수첩, 휴대폰 정도면 충분합니다. 중요한 건 성능이 아니라 언제든 기록을 시작할 수 있는 상태예요.

기록을 위해 완벽한 조건을 기다리다 보면 오히려 놓치는 장면이 많아요. 날씨가 좋을 때, 시간이 충분할 때,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그런 순간은 좀처럼 오지 않더라고요. 어느 날 깨달았어요. 지금 이 감정과 풍경은 다시 재생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걸요. 그 뒤로는 눈길을 끄는 장면을 만나면 바로 담았습니다. 다음에 또 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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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에 사용한 필름 카메라 (미놀타 X-700, Contax T2, 올림푸스 OM4TI) / 떠오르는 영감을 기록한 수첩들. 세어보니 42개나 되었다.


첫 필름 카메라는 ‘미놀타 X-700’이었어요. 이후 더 가볍고 빠르게 기록하고 싶어 ‘Contax T2’를 사용했고, 렌즈를 다양하게 바꾸고 싶을 땐 ‘올림푸스 OM4TI’를 꺼냈죠. 도구가 가벼워질수록 기록은 일상이 됩니다. 처음이라면 도구를 가볍게 준비해 보세요. 시시때때로 기록을 즐기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다음은 하나에서 시작하기. 처음 필름 카메라를 잡았을 때 이런 메모를 남겼어요.


‘빛이 좋아서였나.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의 탄생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멈추게 하는 힘이 좋아서였던가.
카메라가 좋아지는 이유는 점점 더 많아진다.’


처음엔 그저 막연한 끌림일지 몰라도, 계속하다 보면 이유는 점점 명확해져요. 그냥 하나만 마음에 들어도 일단 시작해 보는 게 중요해요.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것을 티내기. 친구들에게 말하고, SNS에 올리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며 나를 떠올려줍니다. 새로운 정보를 건네주기도,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주기도 하죠.

취향은 혼자만의 세계에서 깊어지기도 하지만, 나눌 때 더 단단해집니다. 지난 기록을 돌아보면 그 시절 내가 무엇을 바라봤는지 보여요. 기록은 어쩌면 훗날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같아요. 작게는 개인의 추억이, 멀리 보면 가족의 보물이 되기도 하죠. 조금 더 용기 내어 세상과 나눈다면, 누군가에게 닿아 새로운 기회와 의미 있는 활동으로 연결될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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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은 훗날의 나에게 미리 건네는 편지 같아요. from. 장혜영 탐방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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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Note.
뉴질랜드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작가님의 기록은 멈추지 않았어요. 한국을 찾을 때마다 간판 기록을 이어가는 한편, 이방인으로서 느낀 감정을 담아 뉴스레터 ‘다정한 시선’을 발행하기 시작했죠. 여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문화시설 하나 없는 뉴질랜드 소도시 헌틀리에서 마을 잡지 『브릭(Brick)』 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낯선 도시의 초라함에 잠시 주춤했지만, 결국 스스로 콘텐츠가 되기로 마음먹은 거예요. 장소가 바뀌어도 기록하는 사람은 결국 다시 기록하게 된다는 걸 작가님을 보며 새삼 깨달았습니다. 

취향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오래 바라본 끝에 생기는 것 아닐까요. 무언가를 꾸준히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결심이 섭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어느덧 봄이에요.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3월의 로컬입니다. 탐방러 여러분도 오늘, 동네의 장면 하나를 수집해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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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장혜영 / 간판.zip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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