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오래된 책장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열어요.

2025-01-10

남해│손동원(밝은달빛책방)

인터뷰 ep.64



혹시 어릴 적 꿈을 이룬 탐방러가 있나요? 🙋 오늘의 주인공, 동원 님은 꿈을 이루었대요. 바로, 책방지기. 그런데 이 책방 조금 특별해요. 문 앞에는 어린 왕자가 손을 흔들며 반겨 주고, 안으로 들어가면 책장을 넘기는 소리보다 대화 소리가 먼저 들려오거든요. 게다가 아기자기한 작품들의 모습은 마치 작은 갤러리에 온 듯한 느낌도 들죠. 지역과 호흡하며 책보다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동원 님을 만나러, 밝은달빛책방으로 향했어요.


차 한잔의 여유와 동화 같은 만남, 밝은달빛책방 ©탐방



어릴 적 꿈이 떠올랐어요.


7년 전, 아내와 함께 프랑스 파리에 간 적이 있어요. 오래된 서점에 방문했는데, 할아버지가 코에 산소호흡기를 달고 맞이해주셨어요. 잔돈을 거슬러주시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죠. 몸이 불편하신데도 최선을 다해서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이 참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그때 구입한 책이 바로 1950년판 어린 왕자였어요. 책방을 나서서 오랜만에 ‘어린 왕자’를 읽는데, 아주 오래된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맞아, 어렸을 때 꿈이 책방을 여는 거였지.’ 그날 마음먹었어요. 은퇴하면 작은 도시로 내려가 책방을 열어야겠다고요. 파리에서 만난 할아버지와 어린 왕자 책이 다시금 오랜 꿈을 떠올려 준 것이죠. 그래서 밝은달빛책방은 어린 왕자를 컨셉으로 책방을 꾸몄어요. 어린 왕자와 달빛, 남해와도 잘 어울리지 않나요?(웃음)


일부 헌책의 경우, 흥정도 가능한 밝은달빛책방 ©탐방


한 학생이 책방의 큐레이션은 무엇인지 물은 적이 있어요. “따로 큐레이션은 없다.”고 답했죠. 밝은달빛책방은 중고책부터 그림책, 쓸모를 다한 물건들을 활용한 작품, 그리고 여행 중에 모은 앤틱과 빈티지 소품까지 다양하게 취급해요. 헌책은 꽂혀 있는 책장마다 “OO의 서고”라고 적혀 있는데, 그 책들을 보내준 사람의 이름이 곧 큐레이션이 되는 셈이죠. 이것도 여행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책방을 준비하면서 도쿄에서 가장 큰 중고 서점 거리로 알려진 진보초에 방문했어요. 그곳에 ‘올리뷰스(ALL REVIEWS)’라는 인기 서평 사이트가 운영하는 파사주 바이 올 리뷰라는 공유 서점이 있더라고요. 책장을 개인에게 렌탈해주는데, 200개의 책장이 있으면 200개의 큐레이션이 생기는 시스템이었어요. 물론 일본은 독서 인구가 안정적이고, ‘세건핸즈(중고)’에 대한 수요도 많으니 이런 시도가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아직 버려지는 책이 더 많죠.*

*한 기사에 따르면 전국 대학 도서관에서 최근 5년간(2019~2023) 900만 권 가까운 장서가 폐기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해요. 


최연소 단골 친구인 '서희'의 서고 ©밝은달빛책방


책이 빠르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게 항상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책방을 열어야겠다고 다짐했을 때부터 헌책방을 하고 싶었죠. 책은 주변 지인들에게 기부받았어요. “2년 동안 안 본 책은 앞으로도 보지 않을 거다.”라고 하면서요.(웃음) 주민들도 종종 책방에 책을 두고 가시는데, 그분들의 책은 ‘키다리 아저씨’ 혹은 ‘키다리 아줌마’ 서고에 담겨 있어요. 또 최연소 단골 친구인 ‘서희’의 서고도 두 칸이 있어요. 코로나 시기에 남해로 내려와 자주 오던 친구인데, 서울로 돌아가고 다시 방문했을 때 남겨둔 책으로 서고를 꾸몄죠. 책방이 계속되는 한 이 서고들은 이름 그대로 남아 있을 거예요.



차 한잔 하실래요?


막상 남해에 책방을 열고 보니, 장사는 막연한 기다림이더라고요. 손님이 단 한 분도 오지 않았던 날이 열흘 남짓 있었어요.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시작했기에, 비교적 수월하게 보냈지만(웃음) 평생 장사를 해온 분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좋아하는 물건을 파는 것만이 아닌, 결국 사람을 좋아해야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죠. 우리가 어디를 가든 직원들의 태도에서 그 가게 분위기를 느낄 수 있잖아요. 장사를 한다는 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는 일이구나 싶어요. 요즘은 ‘누가 오실까?’ 기다림을 넘어 설레어요. 손님에게 “차 한잔 하실래요?”라고 권해 보기도 하죠. 함께 차를 마시다 보면 새로운 인연이 생기더라고요.


책방을 찾은 손님들에게 차를 내려주는 동원 님 ©탐방


2023년 6월. 여느 때와 같이 옆집 ‘뉴스타 사진관’ 주인 할아버지와 차 한잔을 나누었죠. 대뜸 여쭤봤어요. “전시해 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뉴스타 사진관 할아버지는 한자리에 50년 동안 사진을 찍어오셨거든요. 하지만, 본인은 평생 전시를 해본 적도 없고, 작품 활동을 한 사람도 아니라 마다하시더라고요. 그리고는 며칠 뒤 프랑스에서 남해로 여행을 온 웹디자이너 로레느를 우연히 만났어요. 남해에 ‘한달살이’를 하러 왔다길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있더라고요. 그걸 보고 “남해 사람들과 풍경을 찍고, 뉴스타 사진관 할아버지와 함께 전시를 열어보면 어떨까요?” 하고 제안했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 전시를 계기로 밝은달빛책방의 ‘우리동네 작가’ 시리즈를 시작하게 됐어요.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한 직업을 이어 온 분들을 보면, 그 자체가 너무 존중받아 마땅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밝은달빛책방은 책방과 전시장이 함께 자리합니다. 책방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손을 거쳐 간 헌책들이, 전시장에는 남해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작품들이 있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동원 님의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합니다. 차 한잔을 건네며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면, 모든 이의 삶과 생각은 놀랍도록 큰 가치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으니까요.


(좌)책방 이웃, 뉴스타 사진관에서 열렸던 <올드앤뉴>사진전 (우)고 이양규 선생님과 로레느 ©밝은달빛책방


‘우리동네 작가’ 시리즈가 남해의 원주민들과 함께 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남해 시리즈’는 남해에 이주해 온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어요. 현재 진행하고 있는 김수정 작가의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억>도 책방에서의 인연으로 시작하게 된 전시예요. 작년에 대구에 사는 작가님이 우연히 밝은달빛책방을 방문해 그린 그림을 보고 자연스레 마음이 갔어요. 원래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리시는데, 부상으로 왼손으로 그린 삐뚤빼뚤한 선이 오히려 더 마음에 와닿더라고요. 그때 제안했어요. “작가님의 그림으로 남해의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록해 보면 어떨까요?”하고요. 남해를 다니다 보니 ‘방앗간이나 양조장 같은 우리의 기억 속 혹은 옛날 추억 속 장소들이 사라져가는 것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냥 사라지는 것보다 이런 것들을 기억하고 기록하자.’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해요. 처음 남해에 왔을 때 가장 의아했던 건, 원주민과 이주민이 함께 만날 기회가 좀처럼 없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음악을 통해 사람들이 편하게 모여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어요. 지자체 도움 없이 자율적으로 진행하고, 내빈석도 따로 두지 않아요. 그저 돌아가며 인사를 나누고 음악을 함께 즐기는 시간이죠. 물론 처음엔 어색해서 슬쩍 뒤로 자리를 피하시는 분도 있긴 했지만요.(웃음) 그렇게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동네 슈퍼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지난번에 뵀죠?”라며 자연스럽게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더라고요. 언제든 남해에 오면, 밝은달빛책방에 들러주세요. 따뜻한 차 한잔 내어드릴게요.(웃음)


언제든 남해에 오면, 밝은달빛책방에 들러주세요. ©탐방



책방 한편에 마련된 차실에서 책방을 거쳐 간 손님들의 사진을 봤어요.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진으로 남긴 순간들이 어느덧 300장이 넘었다 하더라고요. 그 추억들을 모아 사진전 <손님>을 열었는데, 다가오는 2주년에도 같은 전시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하셨죠. 어쩌면, 탐방러도 책을 보러 갔다가 작품에 참여하는 동화 같은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집에 돌아와 책장을 정리했어요. 먼지 가득한 책, 열어보지도 않은 책들을 보며 반성도 하고요. 또 서고를 만든다면 ‘어떤 이름이 어울릴까’ 고민도 해보았죠.📚 올해는 새로운 책보다는, 손때가 묻은 책을 한 번 더 열어 보려고요. 또 아빠의 서고, 친구의 서고를 방문해보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이 될 것 같지 않나요?


💡 밝은달빛책방의 전시나 행사가 궁금하다면 @brightmoonlightbooks에서 확인해 보세요. (계정을 클릭하면 밝은달빛책방 SNS로 연결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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