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김여름 (채집)
인터뷰 ep.79

오늘 탐방러의 출근길은 어떤 풍경이었나요? 혹시 스마트폰 화면만 보느라, 정작 하늘은 얼마나 푸른지 이미 시작된 봄의 신호를 놓치지는 않았나요? 우리는 대개 바삐 움직이느라 앞만 보고 달리며, 일상의 공간을 무심히 지나치곤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무심한 그 틈새에서, 누군가는 남다른 시선으로 찰나의 반짝임을 포착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지하철에서 일상의 반짝임✨을 찾아 전하는, <로컬 아카이브 : 동네의 수집가들> 두 번째 주인공 김여름 작가를 만났습니다.
📸 두 번째 동네의 수집가 : 김여름 작가
지하철역에는 개통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온,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은 타일 벽화가 가득합니다. 어느 하나 같은 모양 없이 저마다의 무늬를 뽐내고 있죠. 김여름 작가는 바로 이 지하철 벽 무늬를 십자수로 채집합니다. 수도권의 촘촘한 지하철 노선은 그에게 거대한 보물 지도와 같습니다. 사람들의 수많은 발걸음 사이 보이지 않았던 도시를 수놓는 지하철 무늬가 흘러넘치고 있는 셈이거든요. 바쁜 인파 사이로 묵묵히 수를 놓으며, 무심한 일상에 ‘반짝임 스위치’를 켜는 김여름 작가의 이야기를 전해 드려요.

지하철에서 채집한 벽 위의 무늬들 ⓒ김여름
무심한 일상에 반짝임 스위치 ON
“마음 급하게 빨리 걸으면 모든 게 흐릿하게 지나가요. 하지만 가끔은 한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서 아주 천천히 걸어보세요. 그때야 구석구석 숨어있는 반짝임이 보이거든요.”
지하철역에 앉아 십자수를 하다 보면 곁을 지나가는 수많은 발걸음이 눈에 보여요. 다들 어딘가로 바삐 향하고 있죠. 그 소란함 속에서 저는 누구에게나 보이지만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는 일상의 사소한 무늬들을 찾아요. 무늬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지만, 어떤 막에 가려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제가 이 무늬들을 십자수로 다듬어 보여드림으로써 그 가려진 막을 걷어내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제 작업을 보고 일상의 사소함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면, 삶이 조금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우리가 꽤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상적인 공간인 지하철에서 반짝임 스위치를 탁 켜는 것처럼 잊고 있던 설렘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걸 나누고 싶어요.

수많은 발걸음 사이, 채집을 시작하는 김여름 작가 ⓒ탐방
사실 엄청나게 내향적인 성향을 가진 INFP거든요.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사람들이 많은 지하철에서 십자수도 하고 촬영도 하다 보면 주변의 시선이 느껴져요. 평소 성격대로라면 지하철에서 채집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절대 아니죠.
하지만 분명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고, 이 일이 재밌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성격 하나 때문에 망설이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시작을 결심했죠. 당시엔 정말 ‘실’과 ‘바늘’ 딱 두 가지만 챙겨서 첫 채집을 시작했어요.
첫 채집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해요.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전에 살던 동네의 익숙한 역을 첫 목적지로 정했거든요. 하지만 막상 현장에 서니 쏟아지는 시선에 긴장되어 손이 떨릴 정도였어요. 집중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 떨림을 뚫고 첫 바늘을 꽂았던 그 순간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지하철 채집가 ‘김여름’의 하루
무작정 집을 나서진 않고, 평소 지하철 무늬가 있는 장소들을 미리 꼼꼼하게 조사해 둬요. 인터넷으로 먼저 찾아보기도 하고, 지하철 사진 속에서 숨은 무늬를 발견해 내기도 하죠. 장소가 정해지면 사전에 실 색깔을 골라 출발합니다. 역에 도착하면 앉을 만한 자리를 찾아 무늬 도안을 그리고, 십자수를 놓고, 그 과정을 촬영해요. 한 역에서 적게는 1시간에서 길게는 2시간 정도를 머물러요. 때로는 예기치 못한 변수가 생겨 5시간도 보내기도 하죠.
오래 머물다 보면,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요. 지하철은 늘 어딘가로 가기 위해 빠르게 거쳐 가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채집을 목적으로 역에 멈춰 서보니, 역을 빠져나온 뒤 마주하는 풍경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수백 번도 오간 온수역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날 ⓒ채집 SNS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온수역이에요. 5년 넘게 수백 번도 더 환승하며 지나다닌 익숙한 역이었는데, 무늬를 채집하러 처음으로 역 밖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야 비로소 근처에 수목원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죠. 채집을 마친 뒤 가벼운 마음으로 그 주변을 산책하는데, ‘내가 이렇게 반짝이는 곳을 매번 그냥 지나치기만 했구나’ 싶어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이제는 채집이 끝나면 근처 동네를 천천히 걸어봐요. 지하철역이라는 점을 찍고, 그 주변의 골목과 풍경을 잇는 나만의 로컬 산책이 시작되는 셈이죠.
사라지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면
가끔은 리모델링 공사로 옛 무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걸 볼 때면 마음이 조급해져요. 조사를 마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갔는데, 이미 공사가 끝나서 보려던 무늬가 영영 사라져 버린 적도 있거든요. 혼자 움직이는 속도보다 무늬들이 세상에서 지워지는 속도가 훨씬 빠르더라고요. 결국 혼자서는 이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겠다는 생각에 사람들의 힘을 빌려보고자 ‘채집가’를 모집하기 시작했어요.
감사하게도 전국에서 75명의 채집가분들이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함께해주셨어요. 아직도 찾지 못한 무늬가 많은데, 채집가들 덕분에 전국 곳곳의 귀한 무늬들이 한곳에 모였어요. 모아 놓고 보니 서로 다른 역인데도 쌍둥이처럼 닮은 무늬가 있는가 하면, 한 역 안에 정말 다양한 무늬가 숨어있는 곳도 있더라고요.
이렇게 모은 무늬들로 ‘🗺️벽 위의 무늬들 지도’를 만들었는데, 타일 형태가 독특해서 눈길을 끄는 것부터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무늬까지 다양해요. 어떤 건 보자마자 ‘이걸 어떻게 십자수로 옮기지?’싶어 웃음이 날 만큼 난이도가 높은 무늬도 있었고요.(웃음)
잠깐 시간을 내어 멈춰 서서 무늬를 채집해 준 분들에겐 감사한 마음을 담아 ‘채집가 증표’를 보내드렸어요. 몇 주 동안 한 분 한 분 생각하면서 정성껏 작업했는데, 걱정했던 것보다 채집가분들이 너무나 다정한 후기들을 보내주셨어요.

채집가의 제보로 알게 된 쌍둥이 무늬와 채집가 증표 ⓒ채집 SNS
‘작가님 덕분에 평소 볼 여유가 없던 지하철역 무늬를 오늘 처음으로 가만히 들여다보았어요.’라는 후기를 읽는데, 가슴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지더라고요. 제가 켠 작은 스위치가 누군가의 마음에도 가닿았다는 확신을 얻은 순간이었죠.
사실 지금도 사람들로 붐비는 지하철에서 홀로 수를 놓다 보면 주변 시선이 의식되곤 해요. 내향적인 제게 그 시선들은 여전히 무겁지만, 이제는 마냥 움츠러들지만은 않아요. 저와 같은 곳을 바라봐 주는 다정한 눈들이 전국 곳곳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거든요. 그 안도감이 계속해서 채집 도구를 챙겨 매주 지하철로 향하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 됩니다.
채집한 무늬, 두고 갈게요!

지하철에서 두고 오는 무늬들, 과연 어떤 분이 주우셨을까요? ⓒ채집 SNS
채집을 마치면 제가 수놓은 작은 조각은 무늬가 있던 현장에 몰래 남겨두고 와요. 정성 들여 만든 결과물이 거창한 작품이 되는 걸 원치 않았거든요.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길 바라죠.
우연히 길을 가다 두고 온 무늬를 발견한 분이 ‘이게 뭐지?’하고 발걸음을 멈추는 상상을 해요. 호기심에 눈길을 주었다가, 그 조각 너머에 원래부터 존재했던 벽면의 무늬를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그 찰나의 순간이 제게는 훨씬 소중하거든요. 제가 만든 조각은 그저 원래 거기 있던 반짝임을 다시 보게 되는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작은 스위치 하나로 온 집 안을 환하게 밝힐 수 있듯이, 남기고 온 이 작은 반짝임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았으면 좋겠어요. ‘오늘 하루가 평소보다 빛나네’라고 느낄 수 있도록 말이죠. 사실 작은 꿈이 하나 있는데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수많은 채집을 진행했던 공간인 지하철역에서 전시를 열어보고 싶어요. 그때가 되면 더 많은 분과 일상의 무늬를 나누며, 우리의 매일이 얼마나 반짝이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요.
누구나 가능한 채집 생활 <채집 가이드>
지하철이 없는 지역이라도 괜찮아요. 십자수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유연한 도구거든요. 처음 십자수를 접하는 분들은 무엇을 담아야 할지 몰라 막막해하시곤 하죠. 그럴 땐 나의 취향이나 일상을 살펴보고 하나의 주제를 정해보세요. 좋아하는 앨범 표지나 영화 포스터, 책 표지도 좋고, 오늘 출근길에 마주친 고양이의 무늬나 창밖 하늘의 구름 같은 것도 훌륭한 채집 대상이 됩니다.
대상을 정했다면 옮겨 담을 십자수 판의 크기를 정해야 해요. 적절한 크기를 정해졌다면 이어지는 모든 작업을 동일한 규격으로 만들어 보시는 걸 추천해요. 같은 크기의 틀 안에 각기 다른 다양함이 담겼을 때, 마치 생물 표본을 보는 것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거든요. 나중에 액자나 앨범으로 보관하기에도 훨씬 수월하고요.
작업에 필요한 실을 준비할 때는 중고 거래를 활용해 보세요. 특정 색깔만 고집하는 게 아니라면, 저렴한 가격에 최대한 다양한 색깔의 실을 한꺼번에 구하는 게 좋습니다. 비용 측면에서 장점도 있지만, 나중에 실을 추가로 구매해야 할 때 이미 가지고 있는 다양한 실뭉치들이 훌륭한 색상 견본집 역할을 해주거든요. 내가 원하는 색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죠.

그간 채집한 지하철 무늬들과 채집 도구(도안용 노트, 십자수판, 실, 바늘, 실 끼우개, 골무, 가위) ⓒ탐방
한 가지 팁을 더 드리자면, 십자수를 하다 보면 눈이 금방 피로해져요. 그래서 십자수 전용 파우치를 만들어 산책을 할 때 들고 나가는 편이에요. 걷다가 마음에 드는 자리에 잠깐 앉아 십자수를 하면, 중간중간 고개를 들어 먼 풍경을 바라보게 되거든요. 자연스럽게 시선을 멀리 두어 눈의 피로를 풀 수 있죠. 십자수를 하고 싶어서 산책을 나서게 되는, 아주 건강한 일상이 만들어지기도 한답니다.
마지막으로 작업을 마치고 자르고 남은 자투리 실들은 버리지 말고 작은 병 안에 차곡차곡 모아보세요. 개인적으로 저는 그렇게 하고 있는데, 시간이 흘러 병에 쌓인 실들의 색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때는 이런 작업을 했었지’하고 당시의 소중한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어요.
기록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거창한 걸 찾으려고 애쓰게 되잖아요. 하지만 마음 급하게 빨리 걸으면 모든 게 흐릿하게 지나가요. 가끔은 한 자리에서 가만히 멈춰 서보기도 하고, 아주 천천히 여유롭게 걷기만 해도 구석구석 숨어있는 반짝거리는 것들이 잘 보이거든요.
여러분도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주변을 채집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찾은 지하철의 무늬들처럼,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도 놓치고 있던 소중한 반짝임이 분명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 매일의 일상이 밝게 빛나길 바라요. from. 김여름 탐방러
Editor’s Note.
여름 작가님과의 인터뷰 이후, 가장 채집하고 싶은 대상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습니다. 문득 우리 집 강아지들의 보송하고 동그란 얼굴이 생각났어요. 까만 콩 세 개가 콕콕 박힌 귀여운 얼굴. 왠지 서툰 손길이라도 한 땀 한 땀 수놓고 싶어지더라고요. 조금 느리고 서툴더라도 정성을 들인 시간만큼, 훗날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거든요. 그 설렘에 결국 초등학교 이후 1n년 만에 십자수 도구를 새로 장만했습니다.(작가님이 알려주신 팁처럼 중고로는 구매하지 못하고 인터넷의 힘을 빌렸지만요😆)
오늘 여러분이 머무는 공간에는 어떤 반짝임이 숨어있나요?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탐방러만의 특별한 무늬를 채집해 보세요. 여러분이 발견한 그 소중한 순간들은 탐방에 꼭 들려주기예요! (약속)
전국│김여름 (채집)
인터뷰 ep.79
오늘 탐방러의 출근길은 어떤 풍경이었나요? 혹시 스마트폰 화면만 보느라, 정작 하늘은 얼마나 푸른지 이미 시작된 봄의 신호를 놓치지는 않았나요? 우리는 대개 바삐 움직이느라 앞만 보고 달리며, 일상의 공간을 무심히 지나치곤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무심한 그 틈새에서, 누군가는 남다른 시선으로 찰나의 반짝임을 포착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지하철에서 일상의 반짝임✨을 찾아 전하는, <로컬 아카이브 : 동네의 수집가들> 두 번째 주인공 김여름 작가를 만났습니다.
📸 두 번째 동네의 수집가 : 김여름 작가
지하철역에는 개통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온,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은 타일 벽화가 가득합니다. 어느 하나 같은 모양 없이 저마다의 무늬를 뽐내고 있죠. 김여름 작가는 바로 이 지하철 벽 무늬를 십자수로 채집합니다. 수도권의 촘촘한 지하철 노선은 그에게 거대한 보물 지도와 같습니다. 사람들의 수많은 발걸음 사이 보이지 않았던 도시를 수놓는 지하철 무늬가 흘러넘치고 있는 셈이거든요. 바쁜 인파 사이로 묵묵히 수를 놓으며, 무심한 일상에 ‘반짝임 스위치’를 켜는 김여름 작가의 이야기를 전해 드려요.
지하철에서 채집한 벽 위의 무늬들 ⓒ김여름
무심한 일상에 반짝임 스위치 ON
“마음 급하게 빨리 걸으면 모든 게 흐릿하게 지나가요. 하지만 가끔은 한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서 아주 천천히 걸어보세요. 그때야 구석구석 숨어있는 반짝임이 보이거든요.”
지하철역에 앉아 십자수를 하다 보면 곁을 지나가는 수많은 발걸음이 눈에 보여요. 다들 어딘가로 바삐 향하고 있죠. 그 소란함 속에서 저는 누구에게나 보이지만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는 일상의 사소한 무늬들을 찾아요. 무늬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지만, 어떤 막에 가려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제가 이 무늬들을 십자수로 다듬어 보여드림으로써 그 가려진 막을 걷어내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제 작업을 보고 일상의 사소함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면, 삶이 조금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우리가 꽤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상적인 공간인 지하철에서 반짝임 스위치를 탁 켜는 것처럼 잊고 있던 설렘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걸 나누고 싶어요.
수많은 발걸음 사이, 채집을 시작하는 김여름 작가 ⓒ탐방
사실 엄청나게 내향적인 성향을 가진 INFP거든요.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사람들이 많은 지하철에서 십자수도 하고 촬영도 하다 보면 주변의 시선이 느껴져요. 평소 성격대로라면 지하철에서 채집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절대 아니죠.
하지만 분명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고, 이 일이 재밌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성격 하나 때문에 망설이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시작을 결심했죠. 당시엔 정말 ‘실’과 ‘바늘’ 딱 두 가지만 챙겨서 첫 채집을 시작했어요.
첫 채집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해요.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전에 살던 동네의 익숙한 역을 첫 목적지로 정했거든요. 하지만 막상 현장에 서니 쏟아지는 시선에 긴장되어 손이 떨릴 정도였어요. 집중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 떨림을 뚫고 첫 바늘을 꽂았던 그 순간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지하철 채집가 ‘김여름’의 하루
무작정 집을 나서진 않고, 평소 지하철 무늬가 있는 장소들을 미리 꼼꼼하게 조사해 둬요. 인터넷으로 먼저 찾아보기도 하고, 지하철 사진 속에서 숨은 무늬를 발견해 내기도 하죠. 장소가 정해지면 사전에 실 색깔을 골라 출발합니다. 역에 도착하면 앉을 만한 자리를 찾아 무늬 도안을 그리고, 십자수를 놓고, 그 과정을 촬영해요. 한 역에서 적게는 1시간에서 길게는 2시간 정도를 머물러요. 때로는 예기치 못한 변수가 생겨 5시간도 보내기도 하죠.
오래 머물다 보면,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요. 지하철은 늘 어딘가로 가기 위해 빠르게 거쳐 가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채집을 목적으로 역에 멈춰 서보니, 역을 빠져나온 뒤 마주하는 풍경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수백 번도 오간 온수역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날 ⓒ채집 SNS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온수역이에요. 5년 넘게 수백 번도 더 환승하며 지나다닌 익숙한 역이었는데, 무늬를 채집하러 처음으로 역 밖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야 비로소 근처에 수목원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죠. 채집을 마친 뒤 가벼운 마음으로 그 주변을 산책하는데, ‘내가 이렇게 반짝이는 곳을 매번 그냥 지나치기만 했구나’ 싶어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이제는 채집이 끝나면 근처 동네를 천천히 걸어봐요. 지하철역이라는 점을 찍고, 그 주변의 골목과 풍경을 잇는 나만의 로컬 산책이 시작되는 셈이죠.
사라지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면
가끔은 리모델링 공사로 옛 무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걸 볼 때면 마음이 조급해져요. 조사를 마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갔는데, 이미 공사가 끝나서 보려던 무늬가 영영 사라져 버린 적도 있거든요. 혼자 움직이는 속도보다 무늬들이 세상에서 지워지는 속도가 훨씬 빠르더라고요. 결국 혼자서는 이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겠다는 생각에 사람들의 힘을 빌려보고자 ‘채집가’를 모집하기 시작했어요.
감사하게도 전국에서 75명의 채집가분들이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함께해주셨어요. 아직도 찾지 못한 무늬가 많은데, 채집가들 덕분에 전국 곳곳의 귀한 무늬들이 한곳에 모였어요. 모아 놓고 보니 서로 다른 역인데도 쌍둥이처럼 닮은 무늬가 있는가 하면, 한 역 안에 정말 다양한 무늬가 숨어있는 곳도 있더라고요.
이렇게 모은 무늬들로 ‘🗺️벽 위의 무늬들 지도’를 만들었는데, 타일 형태가 독특해서 눈길을 끄는 것부터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무늬까지 다양해요. 어떤 건 보자마자 ‘이걸 어떻게 십자수로 옮기지?’싶어 웃음이 날 만큼 난이도가 높은 무늬도 있었고요.(웃음)
잠깐 시간을 내어 멈춰 서서 무늬를 채집해 준 분들에겐 감사한 마음을 담아 ‘채집가 증표’를 보내드렸어요. 몇 주 동안 한 분 한 분 생각하면서 정성껏 작업했는데, 걱정했던 것보다 채집가분들이 너무나 다정한 후기들을 보내주셨어요.
채집가의 제보로 알게 된 쌍둥이 무늬와 채집가 증표 ⓒ채집 SNS
‘작가님 덕분에 평소 볼 여유가 없던 지하철역 무늬를 오늘 처음으로 가만히 들여다보았어요.’라는 후기를 읽는데, 가슴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지더라고요. 제가 켠 작은 스위치가 누군가의 마음에도 가닿았다는 확신을 얻은 순간이었죠.
사실 지금도 사람들로 붐비는 지하철에서 홀로 수를 놓다 보면 주변 시선이 의식되곤 해요. 내향적인 제게 그 시선들은 여전히 무겁지만, 이제는 마냥 움츠러들지만은 않아요. 저와 같은 곳을 바라봐 주는 다정한 눈들이 전국 곳곳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거든요. 그 안도감이 계속해서 채집 도구를 챙겨 매주 지하철로 향하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 됩니다.
채집한 무늬, 두고 갈게요!
지하철에서 두고 오는 무늬들, 과연 어떤 분이 주우셨을까요? ⓒ채집 SNS
채집을 마치면 제가 수놓은 작은 조각은 무늬가 있던 현장에 몰래 남겨두고 와요. 정성 들여 만든 결과물이 거창한 작품이 되는 걸 원치 않았거든요.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길 바라죠.
우연히 길을 가다 두고 온 무늬를 발견한 분이 ‘이게 뭐지?’하고 발걸음을 멈추는 상상을 해요. 호기심에 눈길을 주었다가, 그 조각 너머에 원래부터 존재했던 벽면의 무늬를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그 찰나의 순간이 제게는 훨씬 소중하거든요. 제가 만든 조각은 그저 원래 거기 있던 반짝임을 다시 보게 되는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작은 스위치 하나로 온 집 안을 환하게 밝힐 수 있듯이, 남기고 온 이 작은 반짝임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았으면 좋겠어요. ‘오늘 하루가 평소보다 빛나네’라고 느낄 수 있도록 말이죠. 사실 작은 꿈이 하나 있는데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수많은 채집을 진행했던 공간인 지하철역에서 전시를 열어보고 싶어요. 그때가 되면 더 많은 분과 일상의 무늬를 나누며, 우리의 매일이 얼마나 반짝이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요.
누구나 가능한 채집 생활 <채집 가이드>
지하철이 없는 지역이라도 괜찮아요. 십자수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유연한 도구거든요. 처음 십자수를 접하는 분들은 무엇을 담아야 할지 몰라 막막해하시곤 하죠. 그럴 땐 나의 취향이나 일상을 살펴보고 하나의 주제를 정해보세요. 좋아하는 앨범 표지나 영화 포스터, 책 표지도 좋고, 오늘 출근길에 마주친 고양이의 무늬나 창밖 하늘의 구름 같은 것도 훌륭한 채집 대상이 됩니다.
대상을 정했다면 옮겨 담을 십자수 판의 크기를 정해야 해요. 적절한 크기를 정해졌다면 이어지는 모든 작업을 동일한 규격으로 만들어 보시는 걸 추천해요. 같은 크기의 틀 안에 각기 다른 다양함이 담겼을 때, 마치 생물 표본을 보는 것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거든요. 나중에 액자나 앨범으로 보관하기에도 훨씬 수월하고요.
작업에 필요한 실을 준비할 때는 중고 거래를 활용해 보세요. 특정 색깔만 고집하는 게 아니라면, 저렴한 가격에 최대한 다양한 색깔의 실을 한꺼번에 구하는 게 좋습니다. 비용 측면에서 장점도 있지만, 나중에 실을 추가로 구매해야 할 때 이미 가지고 있는 다양한 실뭉치들이 훌륭한 색상 견본집 역할을 해주거든요. 내가 원하는 색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죠.
그간 채집한 지하철 무늬들과 채집 도구(도안용 노트, 십자수판, 실, 바늘, 실 끼우개, 골무, 가위) ⓒ탐방
한 가지 팁을 더 드리자면, 십자수를 하다 보면 눈이 금방 피로해져요. 그래서 십자수 전용 파우치를 만들어 산책을 할 때 들고 나가는 편이에요. 걷다가 마음에 드는 자리에 잠깐 앉아 십자수를 하면, 중간중간 고개를 들어 먼 풍경을 바라보게 되거든요. 자연스럽게 시선을 멀리 두어 눈의 피로를 풀 수 있죠. 십자수를 하고 싶어서 산책을 나서게 되는, 아주 건강한 일상이 만들어지기도 한답니다.
마지막으로 작업을 마치고 자르고 남은 자투리 실들은 버리지 말고 작은 병 안에 차곡차곡 모아보세요. 개인적으로 저는 그렇게 하고 있는데, 시간이 흘러 병에 쌓인 실들의 색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때는 이런 작업을 했었지’하고 당시의 소중한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어요.
기록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거창한 걸 찾으려고 애쓰게 되잖아요. 하지만 마음 급하게 빨리 걸으면 모든 게 흐릿하게 지나가요. 가끔은 한 자리에서 가만히 멈춰 서보기도 하고, 아주 천천히 여유롭게 걷기만 해도 구석구석 숨어있는 반짝거리는 것들이 잘 보이거든요.
여러분도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주변을 채집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찾은 지하철의 무늬들처럼,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도 놓치고 있던 소중한 반짝임이 분명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 매일의 일상이 밝게 빛나길 바라요. from. 김여름 탐방러
Editor’s Note.
여름 작가님과의 인터뷰 이후, 가장 채집하고 싶은 대상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습니다. 문득 우리 집 강아지들의 보송하고 동그란 얼굴이 생각났어요. 까만 콩 세 개가 콕콕 박힌 귀여운 얼굴. 왠지 서툰 손길이라도 한 땀 한 땀 수놓고 싶어지더라고요. 조금 느리고 서툴더라도 정성을 들인 시간만큼, 훗날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거든요. 그 설렘에 결국 초등학교 이후 1n년 만에 십자수 도구를 새로 장만했습니다.(작가님이 알려주신 팁처럼 중고로는 구매하지 못하고 인터넷의 힘을 빌렸지만요😆)
오늘 여러분이 머무는 공간에는 어떤 반짝임이 숨어있나요?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탐방러만의 특별한 무늬를 채집해 보세요. 여러분이 발견한 그 소중한 순간들은 탐방에 꼭 들려주기예요! (약속)
💡더 많은 채집 작업이 궁금하다면 @chaezip.chaezip에서 만나보세요! (클릭하면 SNS로 연결됩니다.)